독서일기(인문)

정의의 아이디어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20. 9. 11. 12:20

1. 개괄

아마르티아 센이 쓴 '정의의 아이디어'를 읽었다. 저자는 1988년 후생경제학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적 있다. 이 책은 롤스를 비롯한 주류 정의론을 비판한다. 완전한 정의와 완벽히 공정한 제도에 골몰하기보다,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여 가치 판단의 복수성을 인정하고 비교접근을 통해 부정의를 제거해가는 방식으로 정의를 촉진하자고 제안한다. 공적 추론, 민주주의, 글로벌 정의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기존의 이론보다 현실세계에 부합함을 입증한다.

 

2. 발췌

정의를 정의하는 기준은 다원적일 수밖에 없으며 부정의를 제거하고 방지할 완전한 제도의 구축은 불가능한다. 따라서 완벽한 정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여 실현 가능한 선택지들을/과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분배의 문제에서도 기본가치로 정해진 지표를 척도로 삼을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실제 역량에 주목해야 한다. 자원이 동일하게 주어져도 그것을 활용하여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정도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세계가 완벽히 정의로울 수는 없다는 인식이 아니라-그렇게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주변에 분명히 바로잡을 수 있는 부정의가 존재하며 그것을 없애고 싶다는 인식이다.

 

비이성은 대부분의 경우 추론이 완전히 결여된 것이 아니라 매우 원초적이고 불완전한 추론에 의지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희망이 있다. 서툰 추론은 더 나은 추론에 맞닥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도전을 받은 많은 이들이 적어도 처음에는 이성에 입각한 교전에 참가하려 하지 않을지라도 그 여지는 분명 존재한다.

 

계몽주의 시기 급진적 사상을 이끈 유력한 철학자들은 정의의 추론에 관해 두 계통으로 나뉘어 있었다.

(1) 17세기 토마스 홉스의 작업에서 비롯되어 장 자크 루소 등 뛰어난 사상가들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계승되었으며 사회적으로 공정한 제도장치를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는 선험적 제도주의라 불릴만한 것으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정의와 부정의의 상대적 비교가 아니라 완벽한 정의라 여겨지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둘째 선험적 제도주의는 완벽을 추구하며 주로 제도를 바로잡는 데 집중하고, 궁극적으로 출현하게 될 실제 사회에는 직접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2) 다른 계몽주의 이론가들은 사회적 실현과 관계되는 다양한 비교론적 접근을 취했다. 특히 애덤 스미스, 콩도르세, 제러미 벤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현중심적 비교에 초첨을 맞춘 이들은 보통 그들이 본 세계에서 명백한 부정의를 제거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다. 두 접근법 즉, 선험적 제도주의와 실현 중심적 비교 간의 거리는 매우 중대하다.

 

정의의 과제는 단지 완벽하게 공정한 사회나 사회적 장치를 달성하려는 - 혹은 달성을 꿈꾸는 - 것이 아니라 명백히 심각한 부정의를 막는 데 있다. 예컨대 18세기 및 19세기에 사람들이 노예제 철폐를 부르짖었을 때, 그들은 노예제의 폐지가 세상을 완벽히 공정하게 만들 것이라는 환상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예제가 있는 사회가 완전히 부당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기근으로 수천만 명이 죽은 직후인 1962년 마오는 공산당 간부단 7000명이 모인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민주주의가 없으면 아래쪽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전반적 상황이 불분명하며, 사방에서 충분한 의견을 모을 수 없고, 상하 간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수뇌부는 편파적이고 부정확한 자료에 의존하여 사안을 결정할 것이고, 주관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해의 통일, 행동의 통일을 이룰 수 없고 참된 중앙집권체제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경제성장을 뛰어넘어 발전과 사회복지의 요건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정치적 시민적 권리가 여러 상황에서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자유를 촉진한다는 광범위한 증거에 주목해야 한다.

 

거리낌 없이 소수자 권리를 제거하려는 무자비한 다수자가, 다수결 원칙과 소수자 권리의 보장 가운데 선택할 것을 사회에 강요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체제가 원활히 기능하기 위해서는 관용적 가치의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의 입안자들은 인권의 표명된 승인이 전 세계의 인권을 법률화하기 위해 제정될 새로운 법의 본보기로 기능하기를 분명히 기대했다. 초점은 새롭게 법제화하는 데 있었지 기존의 법적 보호를 더 인도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지 않았다.

 

벤담은 권리를 법의 자식으로 보았지만 하트의 관점은 인권을 사실상 법의 부모로 여기는 형식을 취한다.-인권은 특정한 법제화를 낳는다.

 

과정과 기회 모두 인권에 포함될 수 있다. 자유의 기회의 측면에서는 역량 - 가치 있는 기능을 달성할 실제 기회 - 의 개념이 자유를 정식화하는 데 유용하겠지만, 과정의 측면과 관련된 문제는 자유를 역량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적절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 수감될 때 적법절차가 부정되는 것은 인권의 주제가 될 수 있다. - 공정한 재판을 거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 기대할 수 있든 없든.

 

만일 실현 가능성이 사람들이 권리를 갖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자유를 그 침해로부터 보장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하므로, 사회적 경제적 권리뿐만 아니라 모든 권리가 - 자유권조차- 무의미해질 것이다...비실현 자체가 주장되는 권리를 비권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층 더한 사회적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상반되는 신념이 아무리 일견 타당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그에 대한) 미숙하고 조잡한 항의가 아무리 유창하게 들릴지라도, 필요한 것은 상반되는 신념의 즉각적 거부가 아니라 공적 추론이다. 공적 토론에 편견 없이 참여하는 것은 정의의 추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공적 토론의 중요성이 본서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면, 평가활동에서 정당히 수용될 수 있는 이유의 복수성을 인정할 필요성 또한 마찬가지였다...정의에 대해 판단하려면 다양한 종류의 이유와 평가적 관심사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콩도르세와 스미스가 노예제의 폐지가 세상을 훨씬 덜 불공정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노예제가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를 비교하여 후자에게 찬성할 가능성을, 다시 말해 노예제 없는 세계의 우월성-그리고 더 큰 정의- 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들은 그러한 결론을 주장하면서 다양한 제도와 정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완전히 순위 매겨야 한다고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정의에 관한 논쟁은 - 실용성과 관련해서는 - 비교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완벽히 공정한 사회의 선험적 요건을 정의하는 것은,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현실 사회를 이상화하는 방법에 관한 수많은 다른 요구들을 - 그러한 변화가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지는 차지하고 -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정의를 촉진하는 변화나 개혁이 요구하는 것은 그 공정한 사회의 흠 없는 정의가 아니라 비교평가이다.

 

상호의존성은 한 국가의 부정의감이 다른 국가의 삶과 자유에 미치는 영향도 포함된다. '어딘가의 부정의는 모든 곳의 정의에 위협이 된다'라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는 1963년 4월,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 썼다.

 

닫힌 공평성은 공평성 - 그리고 공정성 - 을 정의의 개념에 중심적이게 만드는 성질을 결여하고 있다.

먼 곳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애덤 스미스의 공평한 관찰자를 이용하는 활동의 일부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논의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의의 문제의 초점을 내가 선험적 제도주의라 불러온 것이 아닌 첫째, 사회적 실현의 평가, 즉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둘째 정의의 향상에 관한 비교의 문제에 맞추어야 하는 강력한 논거가 있다. 

 

3. 소감

책 제목을 정의의 아이디어라고 붙인 것이 인상적이다.

2020. 9. 11. 서울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