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성찰)

살아가겠다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5. 1. 17. 12:03

1. 개괄

고병권이 쓴 <살아가겠다>를 읽었다. 저자는 연구공동체 '수유너머R'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강의를 하고 있다. 이 책은 1부 삶, 2부 사건, 3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연과 인터뷰를 모아 놓았다.

 

2. 발췌

다른 것도 아니 철학이 철학자의 삶과 무관하게 하나의 지식으로 유통될 수 있다는 것은 참 서글픈 현실이다.

 

내게 철학은 '앎의 대상'이라기보다 '행함의 지혜'이고, 결국 '행함으로 드러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앎이지만 또한 행함이다.

 

완전히 문을 열어두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해도, 우리는 어떻든 조금은 문을 열어두어야 하고, '문밖에서' 조금은 교섭할 용기를 마련해두어야 한다. 도둑이 들어오는 그 문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손님도 들어오는 것이니 말이다. 문을 걸어두면 도둑도 없지만 손님도 없다.

 

디오게네스에게는 '마네스'라는 이름의 노예가 있었다. 그런데 그 노예가 도망을 쳤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도망 노예'를 추적하고자 했다. 그때 디오게네스가 말했다. '마네스는 디오게네스 없이 살 수 있는데 디오게네스는 마네스 없이 살 수 없다면 그건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지능이 열등할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 바보가 생겨난다고 했다.

 

리영희가 '사상의 은사' 혹은 '의식화의 주범'이었다면 그것은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즉, '의식화'란 '동일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기' 자체이며, 일종의 일깨움이자 각성이라고.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계몽의 비밀이 '지식'이 아니라 '용기'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장애를 가졌기에 이런저런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노들야학은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은' 그에게도 뭔가를 일깨웠다. 바로 욕망이댜. 교육은 이처럼 지식 이전에 욕망이 생기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

 

삶과 무관할 때 앎은 단순한 지식과 정보에 머무르고, 공부는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고대로부터 교육자에게 내려오는 하나의 가르침이 갖는 위력을 실감했다. '살아온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살아가라'

 

나는 우리가 지금 벽처럼 마주하고 있는 '불가능'을 자각할 때에만 어떤 '가능'이 열린다는 걸 월가 점거를 보면서 실감했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과거 공동체에서는 공동체 성원이 모두 굶어 죽을 수는 있어도 개인이 굶어 죽는 일은 없다고 했다.

 

노예는 자신의 열등함과 무력함을 그 누구보다 빨리 승인함으로써, 예속된 상황 아래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 한다. 그것이 노예의 처세술이다. 그것이 또한 그가 평생 노예인 이유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능력이 없을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 노예가 되고, '진짜' 바보가 된다.

 

나는 희망버스를 보면서 노동운동이 사회운동과 구분 불가능한 지점으로 들어간 것은 노동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고 말했다.

 

들뢰즈의 표현을 따 말하자면 "단 한 사람의 성원으로 구성된다고 해도 셀 수 없는 역량을 갖고 있는 집단"이 있다. 기존 척도를 문제 삼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집단이 바로 그렇다. 이들은 숫자와 상관없이 사회를 이행시킬 무한 잠재력을 갖기 때문이다.

 

3. 소감

일독을 권한다.

 

            2015. 1. 17.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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