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성찰)

늙어감에 대하여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4. 12. 21. 18:31

1. 개괄

장 아메리가 쓴 <늙어감에 대하여>를 읽었다. 저자의 본명은 한스 차임 마이어이고, 191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938년 벨기에로 이주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다가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2년 동안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다. 전후 브뤼셀에서 자유기고가와 방송작가로 활동하였다. 1978년 잘츠부르크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이 책은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 발췌]

시간은 내적 감각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니까 시간은 우리 자아와 우리가 처한 상태를 직관하는 형식이다. 분명한 이야기가 아닌가? 공간에서 A는 언제라도 거닐며 자신이 품은 의도를 실현해낼 수 있다. 이런 외적 감각으로서의 공간은 감각 가운데서도 가장 감각적인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공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듯, 우리는 시간을 우리 자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없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없다. 물론 시간은 그 누구도 완전히 풀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다. 시간을 손아귀에 움켜쥐듯 잡아볼 수는 없을까?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

 

이성은 실증적 인식을 얻고자 할 때는 귀중하기 짝이 없으며, 유일한 자격을 갖는 생각의 도구다. 그러나 근본적인 모순이 그 어떤 정당성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곳에서는 이 단단하게 굳어진 이성이 불필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시간을 나중에 감지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인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온 논리적 사고의 규칙을 무시할 수밖에 없다...시간은 공간과 달리 현실의 논리를 알지 못한다.

 

시간은 과거의 어떤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종말까지 최단거리를 이어주는 직선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이른바 '지향성의 장'이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가 아닐까? 시간은 죽음을 재깍거리며 알려주면서 그 순전한 시간성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격적인 차원은 시간으로서의 미래가 아닐까?

 

죽음은 나의 탈공간화라는 모순된 사건에서, 말 그대로의 의미로 '나의 파괴'다.

 

노인은 나이를 먹으면서 비로소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 공간과 시간에서 방향을 잃는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곁에 있는 사람이 늙어 죽어가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반면, 우리 자기 자신만큼 살고 늙어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한사코 들어내려 한다.

 

우리가 처한 운명을 두고 성찰할 때, 부조리함과 혼란스러운 생각에 빠질 위험은 피할 수 없다. '늙어감'은 우리에게 그런 성찰을 피할 수 없게 만들며, 또 성찰을 감당할 능력도 준다.

 

존재가 어떤 소유이지 않은 사회체계, 지식 소유가 아닌 사회 체계를 생각할 수는 없을끼? 그래서 존재가 변화와 성장의 존재로 남을 수 있는 사회? 타인의 눈길이 그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듭 다시금 제로 상태로 돌아가 이 원점으로부터 자신을 새롭게 구축하는 사회는 타인과 더불어 존재하며 변회해가는 사회이리라.

 

사르트르는 언제나 인간의 본래적인 차원을 미래에서 찾았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아쉬워하며 되돌리려는 작업을 낭만주의가 말하는 '죽음의 에로틱' 못지않게 경멸했다.

 

사회가 주목하는 것은 변화와 발전의 기회, 곧 미래를 가지는 젊음일 뿐이다. 노년에 이른 우리의 사회적 해체는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이를테면 처음 영국을 여행하는 자동차 운전자는 교통표지판이 대륙과 다른 경우가 많아 자신감을 잃고 중압감에 사로잡혀 차를 천천히 몬다. 시대의 문화적 표시로 혼란을 겪는 늙어가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은 늙어가는 사람에게 불친절해진다.

 

시간에 저항해도 안 되며, 시간의 꽁무니를 따라다녀도 안 된다. 이게 진리다. 물론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빠져나와 영원함을 붙들 출구가 없다는 것도 진리다.

 

결국 인생은 죽는다는 특성으로 의미를 가질 뿐인 인간 실존이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함'이라고 철학자 블라디미르 안켈레비치는 자신의 책 <죽음>에서 썼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만, 죽어가는 과정에서조차 평등하지 않다.

 

3. 소감

가끔 친구들이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고 미래가 궁금할 뿐이다. 1976년 <자유죽음>을 발표하고 1978년 스스로 목숨을 거둔 저자에게 삶은 어떤 의미였을까?

 

    2014. 12. 21. 부산에서 자작나무

 

 

 

 

 

 

 

  

'독서일기(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아가겠다를 읽고  (0) 2015.01.17
수도원기행2를 읽고  (0) 2014.12.31
행복편지 여덟을 읽고  (0) 2014.12.02
죽기 전에 한 번은 유대인을 만나라  (0) 2014.08.04
당신은 행복한가를 읽고  (0) 2013.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