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문)

인간의 조건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7. 13. 07:30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었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평소 소신에 따라 끝까지 읽었다. 저자는 평생을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의식 속에서 살았는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묘사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서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개념을 발전시켜 지성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번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 자체가 바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바로 가능성 자체가 박탈될 위기에 처해 있는 21세기 기술문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물론 가능한 모든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국은 인간실존의 가능성마저 파괴할 수 있다는 철학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이 온 몸으로 겪은 20세기 전체주의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그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결국 인간의 본질을 포함한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계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동일하지 않다. 세계는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다(한나 아렌트).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유태인 학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그의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하지 않는 이 사고력의 결여가 어떻게 한 인간을 세기의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의 생명으로서 살아 있어야 하며, 둘째,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영속적인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하며, 셋째, 말과 행위를 통해 이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생명, 세계성, 다원성을 인간실존의 세 조건이라고 명명한다.

 

이 책의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오늘날 사적인 것을 친밀성의 영역이라 부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이 영역의 초기형태를 우리는 후기 로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이 단어 자체가 보여주듯이 고대에서 사적 생활의 박탈적 특성을 감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였다. 사적 생활은 문자 그대로 어떤 것이 박탈당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도 인간의 능력 중 최고, 최상의 인간적인 것이 박탈당한 것을 의미한다. 사적인 삶만을 사는 사람, 노예와 같이 공론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사람, 이방인처럼 공론 영역을 설립하지 않은 자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사생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제는 더이상 박탈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근대 개인주의로 인하여 사적 영역이 풍요로워진 덕택이다. / 루소가 자신의 이론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국가의 억압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사회가 인간의 마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왜곡하고 가장 내밀한 인간의 영역까지 침투하는 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公的이라는 용어는 첫째, 공중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가능한 가장 폭넓은 공공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로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이고, 우리의 사적인 소유지와 구별되는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한다.

 

공동세계는 그것이 단지 한 측면에서만 보여지고 단지 한 관점만을 취해야만 할 때, 끝이 난다. 공동세계는 오직 이 세계의 관점들의 다양성 속에서만 실존한다.

 

우리가 공동으로 가지는 것과 사적으로 가지는 것의 차이점은 우선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소비하는 사적 소유물이 공동세계의 어떤 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로크가 지적하듯이, 소유가 없다면 공동적인 것은 소용이 없다.

 

선은 보이거나 알려지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공론영역에 대한 기독교의 적대감, 즉 가능한 한 공론 영역을 멀리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초기 기독교의 경향은 모든 믿음과 종말론적 기대와는 무관하게 선한 일에의 헌신에서 오는 자명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행은 공적으로 알려지는 순간, 자체의 고유한 성격인 선, 즉 오로지 '선 자체를 위해서만 행함'의 성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소모와 즐거운 재생이라는 정해진 순환을 벗어나서는 어떠한 지속적인 행복도 없다.

 

삶의 힘은 다산성이다. 유기체가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힘을 다할 때, 그는 소진되지 않는다.

 

말과 행위의 기본조건인 인간의 다원성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가진다. 만일 사람이 동등하지 않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도 또 이전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미래를 계획하거나 장차 올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예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즉 모든 사람들이 현재 살고 있거나 과거에 살았거나 미래에 살게 될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사람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말이나 행위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말과 행위를 통하여 다른 사람과 단순히 다르다는 것을 넘어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한다.

 

말과 행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근본적이고 특별히 인간적인 행위는 동시에 새로 오는 자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 "너는 누군인가"에 답해야만 한다.

 

말 없는 행위는, 행위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다. 행위자는 그가 동시에 말의 화자일 경우에만 행위자일 수 있다. 그가 시작하는 행위는 말에 의해 인간에게 이해된다. 그의 행위가 말을 수반하지 않는 짐슴과 같은 몸짓을 통해 지각될 수 있다 해도, 그가 행위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말을 통해서만 즉 현재 행하고 이전에 행했고 장차 의도하는 것을 알려주는 말을 통해서만 행위는 적절한 것으로 된다.

 

엄격히 말해서 인간사의 영역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인간관계들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다. 말을 통한 인격의 현시와 행위를 통한 새로운 시작의 출발은 항상 이미 존재하는, 그리고 행위와 말의 직접적인 결과들이 감지되는 그물망으로 귀속된다. 행위와 말은 함께 새로운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유일하고 일회적인 인격은 원래 비구체적으로 막연하게 표출되지만, 이야기는 그 인격이 행위와 언어를 통해 사후에 구체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이다. 어떤 사람이 누구였고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알 때에만 가능하다.

 

결과되는 이야기의 성격과 내용이 무엇이든 또 그것이 사적 생활의 이야기든 공적 생활의 이야기든 아니면 다수가 연관되든 소수가 관련되든, 이야기의 완전한 의미는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만 알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누구든 죽기 전에 에우다이몬(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고대의 속담은 2500년 간의 진부한 반복 후에 우리가 여전히 그것의 본래 의미를 들을 수 있다면,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것 같다.

 

모든 전제정치의 공통점은 공론 영역에서 시민을 추방하는 것 그리고 오로지 '지배자만이 공적인 일에 관여해야 하며' 시민들은 사적인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시작한다는 것(아르케인)과 행위한다는 것(프라테인)은 전혀 다른 두 활동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시작하는 자는 '결코 행위할 필요가 없으며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자들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의 본질은 '시기의 적절성을 고려하여 중대한 문제를 시작하고, 지배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행위 그 자체는 완전히 제거되어 '명령의 단순한 실행'이 된다. 플라톤은 처음으로, 행위를 시작과 성취로 나눈 옛 표현 대신에, 알지만 행위하지 않는자와 행위는 하나 알지 못하는 자를 구분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행위가 되었다.

 

용서의 정반대는 아니지만 용서 외에 달리 선택 가능한 것은 처벌이다. 처벌과 용서는 간섭하지 않는다면 무한히 계속될 어떤 것을 끝내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인간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구조적 요소는 인간은 처벌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없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칸트 이래로 우리가 '근본악'이라는 부르는 죄이지만, 이 죄의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조차도, 즉 공적 무대에 드물게 분출된 그것을 경험한 우리조차도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는 그러한 죄들을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인간사의 영역과 인간 힘의 가능성을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은 다 빠진다. 그러나 콩나물은 자란다. 그런 심정으로 이 책을 읽었다.

 

   2011. 7. 13. 진주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