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문)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0. 12. 25. 22:21

김상봉님이 쓴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를 읽었다. 친구가 추천한 책이다. 저자는 마인츠 대학에서 칸트의 <최후 유고>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는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53개의 편지를 보내는 형식을 취하여 그리스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아테네 비극시인들이 예술을 통하여 형성하려 했던 현실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 곧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였다.

 

정치는 내가 너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가장 본질적인 계기는 만남이다.....우리는 언제 참된 의미에서 타인과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만남은 슬픔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비극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슬픔의 자기반성입니다.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해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아리스토텔레스)

 

비극이 그려 보이려 하는 정신의 크기가 오직 정신의 고통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비극의 근원적인 과제는 영웅적 숭고와 위대함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극의 가장 내밀한 본질은 영웅숭배입니다. 그런데 영웅적 정신의 위대함이 오직 비극적 고통과 수난 속에서만 자기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그리스인들이 깨달았을 때 영웅숭배의 예술은 비극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고귀하고 자유로운 정신은 자기와 같은 것, 즉 정신적인 것에서만 가치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노예적 정신은 언제가 자기 아닌 다른 것, 그러니까 사물적인 것의 보호 아래서만 안정을 느낍니다.

 

무릇 모든 것의 크기는 한계에 의해 규정됩니다.

 

인간이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 가운데서도 최종적이고도 절대적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인들의 이해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죽음입니다.

 

비극은 비극적인 시대의 예술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그리스의 역사에서 가장 밝고 행복한 시대의 예술이었던 것입니다.

 

오직 죽음 앞에서만 인간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리스인들의 가장 본질적인 정신적 바탕이 무엇이었습니까? 한마디 말하자면 그것은 자유의 이념이었습니다......그리스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자유를 의미합니다......이런 자유인의 존재를 가리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있음"이라 규정했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경우에도 사적인 것일 수 없으며 언제나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스 비극이 보여주는 정신의 위대함과 숭고는 이처럼 그것이 당함의 비극이 아니라 행함의 비극을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칸트는 단지 행복하기 위해 사는 삶을 혐오했지요. 그는 인간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냥 생존이나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보다 고귀한 가치, 즉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참된 신을 상실한 뒤에는 모든 것이 신이 될 수 있다(파스칼 <팡세> 중)

 

정신이 자기 자신을 반성할 때, 정신은 자기를 단순히 대상적으로 고정시켜 놓고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어떻게든 변화시키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라 시를 "삶의 모방"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시를 통하여 삶이 삶을 모방하는 것으로서, 삶의 자기반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참된 총체성이란 삶에서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룰 때 실현됩니다. 서사시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총체성인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이 서사시에서 출발해 서정시 그리고 비극으로 나아간 것과는 달리 우리는 서정시에서 시작해 비극으로 나아가고 마지막으로 가능하다면 서사시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서사시가 총체성의 예술이라면 서정시는 주체성의 예술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서정시에서 정신은 외부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반성합니다. 이처럼 정신이 안으로 자기를 향해 있는 한해서, 내적인 세계가 펼쳐지는 지평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는 바로 여기에 존립하는 것입니다.

 

비극은 처음부터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소통을 목표를 하는 예술입니다.

 

비극이 합창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비극시인들은 합창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감정과 정서적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이것이 멍청한 맹목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깨어서 생각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대화란 시민들이 더불어 생각함의 형식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 공감이야말로 비극이 추구한 새로운 총체성이었습니다....도대체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그것은 만남과 나눔입니다.

 

비극은 대화를 통해 주체들을 만나게 하되, 이 만남을 통해 합일의 상태를 보여주기보다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하는 대립을 대립으로서 드러냅니다.....비극은 다만 대립 속에 있는 다양한 관점들을 보존하면서 서로 매개하려 할 뿐입니다. 매개란 쉽게 말해 관계를 맺어주는 것인데, 이것은 이행 즉 건너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생각하면 바로 이런 '슬픔 속에서 만남'이야말로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요체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비극이 사람들에게 주는 쾌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연민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카타르시스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자기의 고통을 초월하고 극복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오직, 자신도 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타인의 불행만을 동정한다(루소의 <에밀> 중)

 

비극은 맹아적 단계에서는 합창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비극은 그 합창에 배우들의 대화가 결합됨으로써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이 한번 한 맹세는 결코 되물릴 수 없었습니다. 로고스 즉 말을 신적인 것이라 생각했던 그리스인들은 그만큼 말 한마디 한마디를 무겁게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비극을 통하여 인간이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할 때 진정으로 만날 수 있고, 이러한 만남이 개인과 개인을 연결시켜 세상의 주인이 되게 한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저자는 그리스비극이 아니라 현재의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삶을 이야기 하고 싶어한다. 

 

         2010. 12. 25.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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