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문)

왜 도덕인가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0. 11. 21. 20:31

마이클 샌델 교수 <왜 도덕인가>를 읽었다. 저자는 미국 하버드대학 정치철학 교수이고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공정함과 시민 덕성에 대한 공유된 이해 없이 좋은 삶을 실현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다음, 경제적 도덕, 사회적 도덕, 교육과 도덕, 종교와 도덕, 정치적 도덕에 관한 담론을 제시하고, 개인의 권리와 공공선 중 무엇이 우선인가에 관한 논쟁을 정리한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서로 다른 윤리적, 도덕적 가치가 경쟁할 수 있는 사회, 의견 불일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다.

 

정치적 논쟁에서 이길 가능성을 높이는 첫 번째 방법은 사용하는 용어나 표현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생명권과 자유를 누릴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것이므로 스스로를 노예제도나 자살에 건네줄 수 없다고 로크는 말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권한을 줄 수는 없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제거할 수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할 권한을 타인에게 줄 수도 없다" /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수단으로 이용되는 물건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 자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교정책은 다수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헌법적 논쟁에서 도덕적 역할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는 일이다.

 

자유의 중심에는 인간 생명의 존재와 의미, 신비로움에 관한 개념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한다. 만일 국가의 강제하에 이러한 신념이 형성된다면 그 신념은 개인의 속성을 정의할 수 없다(낙태의 권리에 관해 산드라 데이 오코너, 앤서니 케네디, 데이비드 수터 대법관 의견).

 

블랙먼 대법관은 "인간관계의 다양함과 풍성함의 상당 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논점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결정할 때 "각기 다른 개인은 저마다 다른 선택을 내린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 동성애의 도덕성을 다루지 않고 배제한다는 관용 논리는 상당한 장점을 지닌다......그러나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중립적인 관용은 두 가지 난점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첫째, 현실적으로 볼 때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합의가 전혀 없이 오로지 자율권만을 토대로 사회적 협력이 확보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두 번째 난점은 권리 존중의 질과 관련된다......충분한 존중이 이루어지려면 동성애자의 삶에 대해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인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로지 자율권의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법적, 정치적 담론에 의해서는 그러한 인정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 결국 사람들은 공립학교와 공원, 대중교통을 떠나 특권층과 소수를 위한 좁은 장소를 열망한다. 그 결과 시민적 덕성은 찾아보기 힘들고 공동선은 사라진다. 공동체를 회생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사회구조를 좀먹는 문화적 힘은 물론 경제 권력과도 대항해 싸워야 한다.

 

루이스 D.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거대함의 재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독점과 거대 은행들이 민주주의에 가하는 위협을 지적했다......그는 기업과 트러스트, 은행의 힘이 너무 거대해지면, 그들이 정부를 통제하려 들 것이고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주의 노선은 주로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주장을 펼치거나 또는 국가공동체라는 이상에 호소했지만 케네디는 그와 대조적으로 개인과 정부 사이에 위치한 중간 수준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현대 사회에서는 그러한 공동체가 사라져 가고 있음을 개탄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는 공동체가 없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곳에도 살고 있지 않다.'

 

칸트에 의해 철학적 토대가 마련되고 롤스에 의해 가장 완벽하게 다듬어진 자유주의는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개인의 권리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둘째 이러한 권리를 서술하는 정의 원칙들은 결코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전제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롤스의 차등원칙이 절실히 필요로 하면서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가진 자산을 누구와의 공동 자산으로 간주해야 좋은가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같은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정부가 기본적인 시민적, 정치적 자유를 비롯해 시장경제가 부여한 노동의 대가 또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매겨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재분배정책은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 롤스같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의견을 달리 한다. 그들은 기본적인 사회, 경제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시민적, 정치적 자유를 유효하게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권리지향적 자유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제시하면서도, 인간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정의가 정당성을 갖추려면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칸트, 롤스 그리고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에서 중심이 되는 이러한 생각은 옳음(권리)이 좋음(선)에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 문제는,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좋은 삶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권리를 확인하고 정당화할 수 있느냐이다(마이클 샌델).

 

정치적 정의관에서 도덕적 문제를 제외하기 어려움을 보여주는 두 번째 사례는 1858년 링컨과 더글라스 간에 벌어진 논쟁이다.....더글라스는 사람들이 노예제의 도덕성에 대해 의견을 달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 정책은 그 문제에 관해 중립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링컨은 노예제에 대한 현실적인 도덕적 판단을 피하기보다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예제에서 잘못된 점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 정치적 중립을 주장할 수 있지만, 노예제에서 잘못된 점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논리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어느 누구도 잘못된 것이 수용되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 종교적 담론을 공공생활과 분리시키려는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 즉 정부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

 

다양한 주제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며, 필요한 경우 저자의 입장도 밝힌다. 논쟁과 토론이 부족한 이 사회에서 읽어봐야 할 책이 하나 더 생겼다.

 

          2010. 11. 21.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