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문)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1. 26. 22:56

백승종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을 읽었다. 저자로부터 선물받은 책이다. 저자는 1990년대부터 미시사의 실천운동에 전념해왔다.  이 책은 저자가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을 기술하고 있다. 강이천을 중심에 놓고 그 대척점에 정조를 놓아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를 살피는데, 결국 강이천이 옥사함으로써 패배했다고 결론짓는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정조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 단순하고도 명쾌한 입장을 가졌으니, 그것은 한마디로 기존 가치의 절대 옹호였다.

 

정조는 자신의 보수개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일종의 보수대연합을 구축했는데 그의 탕평이란 이 정책의 다른 이름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조는 최소한의 진보를 용인하고 또한 이를 역이용하여 개혁적 사고의 문화를 근본에서부터 차단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정약용과의 관계가 주목된다. 오늘날 개혁사상가로 추앙되는 정약용은 문예면에서 정조의 기린아였다.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형식 면에서 볼 때 소품은 고문에 비해 문장의 길이가 짧다. 구어를 많이 섞어서 사용한다. 그리고 고문과는 글의 구성방법도 달랐다. 소재와 내용도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소품은 고문에서 불문율로 되어 있는 금기사항을 무시했다. 사회적 소외와 개인의 비밀, 자질구레한 일상생활 등을 주로 다뤘다.....소품의 가장 큰 특징은 글쓰기의 주관성에 있다.

 

정조의 르네상스는 속박이었다. 따라서 나는 정조를 가리켜 르네상스의 군주라고 하는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정조의 문체반정이 하나의 문화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고증학과 양명학과 기타 모든 부류의 이단을 배척하고 정조의 철학적 토대인 성리학을 강화시키는 문화운동이었다.

 

점차로 나는 강이천과 김건순과 김려 등에게는 인격적인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민 지향적이었다. 모든 이가 골고루 사는 평화를 지향했다.

 

요컨대 강이천 일파는 새로운 문화를 지향했다. 그것은 동정심과 자애가 가득한 세상이었다. 그들은 평화와 나눔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한 채 기성 문화의 대변자인 정조는 그들을 여리고, 경박하고, 비뚤어지고, 사소한 사람이라 몰아붙였다.

 

문체반정은 정조가 은밀히 주도한 천주교 퇴치운동이었다. 그래서 당시 정조가 추구한 문체반정을 문화투쟁이라는 개념으로 묶어 보았다.

 

강이천의 마음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고립된 약자를 향한 연민과 동정심으로 가득했다. 태독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한데다 고질적인 종기 때문에 다리마저 제대로 쓰지 못했다.

 

강이천은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801년 3월 29일 밤 옥중에서 눈을 감았다.

 

조정이 천주교를 위험시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정치적 부담감이었다. 천주교는 높고 낮은 신분에 속한 남성과 여성들이 가입된 비밀결사였고, 정감록과 같은 혁세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끼어든 불온한 조직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말세를 주장했고, 구세주 또는 진인의 재림을 믿는 경향도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이방인들과 친교를 맺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이방인들을 정신적 지표로 삼았다. 이것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조선의 정체성을 혼란시켰다. 따라서 조정으로서는 위험하게 생각하는 단체였다.

 

정조는 문제라고 본 새로운 문체를 과거시험을 통해 탄압했다. 이른바 패관소품의 문체가 조금이라도 묻어 있는 글이면 무조건 과거시험에서 떨어뜨렸다.

 

조선의 왕들은 보수성향을 띨 때만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어느 나라든지 집권층은 대개 현상 유지를 바라기 마련이다.

 

조선 국왕의 권력은 명 청시대의 중국의 천자들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당초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정조가 보수적 이념으로 회귀를 천명한 것은, 자신의 처지를 다각적으로 충분히 고려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몇 줄 언급된 사건을 한권의 책으로 풀어헤침으로써 미시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정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다른 관점을 제시하였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2011. 1. 26.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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