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문)

미술관 옆 인문학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1. 30. 14:42

박홍순 <미술관 옆 인문학>을 읽었다. 저자는 동서양 고전을 친근한 벗으로 만드는 일, 고전의 정수를 가까이하는 일을 실천하고 있다. 이 책은 주제와 그림과 해석이 제시된다. 주제는 자유를 향한 여정, 동양과 서양의 시선, 이성의 그늘, 빈곤의 역사를 넘어, 일상성의 비밀, 개인과 사회 그리고 자아로 갈래를 지었다. 그림은 서양과 한국의 명화가 소개되고 있다. 저자의 인문학적 지식은 그림과 주제를 연결한다. 동서양의 고전을 넘다들고 저자의 경험이 어우러져 미술관 옆 오솔길을 걸으면서 저자와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주로 저자가 이야기하고 나는 조용히 듣다가 가끔씩 공감을 표시하는 정도지만......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대량생산을 위한 전제조건인 규격화와 표준화는 현대인의 삶을 특징짓는 가장 대표적인 말이다.

 

개인의 자유는 고독을 먹고 자란다. 사회의 통념이나 부당한 강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고독한 성찰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보부아르 <제2의 성>에서)

 

자유는 항상 억압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다. 억압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폭력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관습과 도덕이라는 틀로 일상화되었을 때 폭력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특히 정치적인 압제가 극심해서 직접적인 저항이 어려울 때 웃음을 매개로 한 풍자는 훌륭한 무기 역할을 한다. 웃음은 신이든 권력이든 두려움의 대상을 희극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사람들의 내면으로부터 저항의 가능성을 확산시킨다.

 

웃음은 권위와 두려움에서의 일시적인 탈출이 아니라 적극적인 저항과 해방이라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 교회는 웃음이나 희극적인 요소를 담은 연극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대신 정숙함, 참회, 슬픔의 감정만을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했다.

 

프로이트는 밤에는 꿈이, 낮에는 농담이 무의식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아내의 죽음을 볼 때도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죽음을 느끼면서 진솔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만큼 인간은 그 앞에서 가장 솔직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나날의 삶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싣고 간다. 그러나 그 시간을 싣고 가야할 그러한 순간은 언제나 오게 마련이다.......결국에 가서는 죽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카뮈 <시지프의 신화> 중에서)

 

나는 램프 밑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접시를 드는 것과 같은 그 손으로 대지를 팠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했다. 곧 이 그림은 '손과 그 노동'을 이야기하고 있다(고흐 편지 중에서)/고흐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 하면서 이전 그림들은 모두 습작이라고 했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지배세력에 불만을 갖고 저항의 흐름이 형성되면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연대의 기반을 파괴하고 철저히 개인으로 고립시키려 했다. 중세 말기에 교회와 귀족들에 의해 자행된 마녀사냥은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 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아드리엔느 리치는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에서 자녀를 둔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지게 되는 정신적 부담이 어떠한 사회적 부담보다도 무겁다는 점을 강조한다

 

현대사회에서 국가와 자본과 같은 권력이 만들어낸 새로운 무기가 바로 일상의 지배이다.

 

맥루한은 각 시대가 의존하고 있는 주요 미디어의 속성이 그 시대의 문화, 즉 메시지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라 주장한다.

 

출판사는 책을 독자에게 판 것이지만, TV 방송사는 수용자를 광고주에게 파는 것(스마이드)

 

일상에서 약간 뒤로 물러서지 않고는, 다시 말해서 그것을 그대로 수락하고 수동적으로 일상을 삼아서는 결코 일상의 본래 모습을 포착하지 못한다(앙리 프레브르)

 

그러면 그토록 친숙한 일상성에서 어떻게 한발 물러설 수 있을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관성이 작용하지만 낯선 존재에 대해서는 관찰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연기했는데, 그 가면을 페르조나 persona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오늘날 인격을 의미하는 person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고 하니 의미심장한 개념이 아닌가 싶다.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관계에서 보여 주는 것에 비해 훨씬 심한 이기주의가 모든 집단에서 나타난다(라인홀드 니버)

 

희망은 절망이 없는 곳에 있는게 아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서 희망의 싹은 움터 오르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은 소감은 다음과 같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를 다시 만난 것은 즐거움이었다. 그가 죄수들의 보행이라는 그림을 그렸다는 건 놀라움이었다. 윤두서의 자화상과 램브란트의 웃는 자화상을 대조하는 것은 재미였다. 저자의 그림에 대한 해설은 참으로 친절하면서도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저자의 인생력과 독서력 때문이리라. 저자는 그림을 소재로 인문학을 이야기하고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다니, 어쨌거나 세상은 진보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2011. 1. 30.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