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소설)

제리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0. 8. 2. 22:18

김혜나씨가 쓴 장편소설 <제리>를 읽었다. 이모 선배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작가는 1982년생이고 이 소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주인공은 수도권에 있는 2년제 야간대학을 다니는 여성인데 공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술과 담배와 섹스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노래바(bar)에서 '제리'라는 남자도우미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고, 노래방에서 제리와 섹스를 마치고 그가 먼저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두 사람이 완전히 헤어진 것인지, 아님 그날만 헤어진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주인공은 이제껏 술과 섹스로 남자를 만나왔기 때문에, 제리와 만나는 일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 인격적 교류 속에 새로운 만남으로 들어선 것인지 작가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원래 주인공에게는 '둘 다 술을 잘 마신다는 것을 빼고는 도무지 이렇다 할 연결 고리가 없었던' 강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와의 만남이 전혀 유쾌하지 않았음에도 그와 굳이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그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구태여 좋은 점을 찾자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혼자서 남아 버리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는데 더 이상 그럴 일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들은 헤어졌다가 만나고 또 헤어진다. 만남과 이별의 경계가 모호하다. 전면적인 소통인 이루어지지 않고 욕망의 접촉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나는 그냥, 지금의 나만 좀 아니었으면, 누군가 내 옆에 좀 있었으면.....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꿈이 없다. 그러나 주인공이 제리를 만나고 나서 '지금 너의 그 손을 한번 펼쳐 봐. 너는 바로 그 담배꽁초처럼 상대방을 손에 쥐고 으그러뜨릴 거잖아'며 연민에 기초한 고민을 한다. 주인공이 제리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 것은 제리 역시 선택받지 못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섹스 도중에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섹스를 그만두는 행위를 통해 배려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민은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고작 섹스 한번 나눈 게 전부인.......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남자에게, 돈만 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남자에게, 돈만 주면 아무에게나 웃음을 팔고 사랑을 파는 남자에게, 내가 왜, 내가 왜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는 고백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주인공에게는 '나는 늘 혼자였고, 그런 내 곁에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머물러 주지 않았다'는 소외감이 있었다. 주인공에게는 '나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내 곁에 머물지 못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제리와 헤어진 후 주인공은 수족관에 있는 금붕어를 보고,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수조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움직이는 물고기와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어한다. 그러던 중 '이내 문이 열리고 수없이 많은 내가,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찰과 고양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나를 괴롭히고 구속하는 것, 동시에 나를 해방하고 구원하는 모든 것이 오직 나 자신 뿐이라는 것을 삶은 담담히 가르쳐 주었다'는 작가의 말이 소설 속에 충분하게 녹아 있다. 

 

40대 이상의 기성세대가 읽으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우석훈 교수가 쓴 <88만 원 세대>를 읽고 20대의 삶이 그렇게 팍팍한가 싶어 놀랐는데, 이 소설의 강도는 <88만 원 세대>를 능가한다. 이 책을 손에 잡은 이상 내려 놓기는 힘들 것이다. 나도 하루만에 다 읽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주인공이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자신의 꿈을 찾고 거기에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면, 만남과 헤어짐을 통하여 삶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계기를 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을 통하여 기성세대에게 신세대의 삶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2010. 8. 2.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