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소설)

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0. 3. 14. 18:27

오르한 파묵이 쓴 소설 <새로운 인생>을 읽었다. 작가는 터키 이스탄불 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중퇴하고 소설쓰기에 전념하였고, 문명 간의 충돌, 이슬람과 세속화된 민족주의 간의 관계와 같은 것을 주제로 작품을 써왔으며 2006년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은 불만족 때문이다'고 말한 바 있다.

 

이책은 주인공인 나 오스만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된 어떤 책의 비밀을 풀기 위해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길을 떠나, 결국 버스 안에서 죽음을 맞는 것으로 끝난다. 옮긴이 이난아 교수는 이 책에 대하여 '종말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 문명의 광폭한 버스 안에서 텔레비전의 영상에 몰두하느라 상상력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기하학적인 경고를 한다. 특히 그는 동양의 도덕과 서양의 합리주의, 물질과 정신, 비디오와 문자가 대치하는 경계의 비정함 또는 타협 속에 신음하는 군상들의 모습을 생동감 있고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머릿말).

 

나는 그 어떤 수업에서도 배우지 못했다. 그 어떤 책에서도 읽지 못했다. 그 어느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자난)의 잠든 모습을 마음껏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란 말인가. 천사여.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거든.

사람들은 대부분 사실 새로운 인생을, 새로운 세계를 원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책의 저자를 죽였던 거야.

 

때로는 영화에서처럼 먼 곳의 세계를 이 세계로 가져오는 유일한 길은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하곤 했어.

 

그녀는 화면에 나오는 키스 장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몇 번의 미끄러운 길과 서너 대의 지친 트럭을 지나친 후, 화면의 키스 장면 대신 우리 것과 닮은 버스가, 우리 것과 전혀 닮지 않은 정겨운 풍경을 배경으로 달리는 장면이 나올 때 그녀는 덧붙였다. "우리는 지금 전혀 알지 못하는 그곳으로 가고 있어"

 

우리는, 대초원 한복판 어느 거리를 걷고 있는 메흐메트를 꼭 찾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새로운 인생이 있는 멋진 신세계에서 책에서 얻은 예지를 실현시켰을 것이었다.

 

나는 비록 늙었지만, 나의 열정은 전혀 시들지 않았어.

 

위대한 사람들이란,위대한 시대, 위대한 나라와 마찬가지로, 곧 터질 것 같이 충전된 힘을 자기 안에 충전한

사람들을 말한다네. 때가 오면, 기회가 되면,새로운 역사가 쓰일 시기가 되면, 이 거대한 힘은, 행동을 개시할

위대한 사람들과 함께 무자비하게 폭발하지.

 

우리에게 시계소리는 바깥세상을 인식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원 뜰의 분수에서 솟아나는 물 소리처럼 우리를 내면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하나의 울림이라네.

 

나는 "문서보관실에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이라고 말했다. 나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정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졌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던 일상의 진부한 습관들로부터

벗어났을 때, 삶이 예전 같지 않음에서 느끼는 슬픔이 마음을 사로잡곤 한다.

 

그는 이제 죽음이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죽음을 정원에 없어서는 안 될 나무, 거리의 친구처럼 받아들였고, 거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원근법에 복종하는 거리 뒤로 해가 사라지고, 가벼운 신선함이 기다란 그림자와 함께 교활한 고양이처럼 골목을 배회하기 시작한 후, 나는 창문으로 시종일관 그의 창을 바라보았다.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의 일부분이야.

 

사랑은 항복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의 원인이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은 일종의 음악이다.....사랑은 언젠간 소멸하는 것이다. 사랑은 절대 후회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결정되어 가는 과정이다.

 

나로 말하면 기억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불행하고 바보 같은 주인공

이다.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하여, 누구와도 다른 목표가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늘날 우리는 패배했지. 서양은 우리를 삼켰어. 짓밟고 지나갔지.....그러나 어느 날, 천년 후의 어느 날, 반드시 이 음모를 끝장내고, 우리의 수프, 껌, 영혼 속에서 그들을 몰아냄으로써 복수를 하고 말거야. 이제 박하사탕을

먹게나.

 

인생은 무엇인가? 시간이다! 시간은 무엇인가? 사고다! 그렇다면 사고는 무엇인가? 인생이다. 새로운 어떤 인생......

 

파묵은 인생과 소설을 동일시하는 작가라고 한다. 그는 사회참여적 소설관을 갖고 있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나는 나 자신을 좌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내가 알고 있는 좌익주의란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좌익주의는 모든 역사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고 말한 바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은유적이면서도 암유적인 문체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조금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는 명제를 이해할 것이다.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는 않는 그의 문장을 보면. 압도당할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