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자작나무의숲 2010. 8. 8. 19:09

신경숙씨가 쓴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었다. 읽을 거리가 없던 차에 아내가 사 둔 책이 눈에 띄어 읽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한다는 작가의 꿈이 이루어진 것 같다.

 

이 소설에는 윤이와 단이, 미루와 명서라는 4명의 남녀가 등장한다. 윤이와 단이, 미루와 명서는 각기 어릴 적부터 붙어 지낸 단짝이었는데, 대학에서 서로 만나게 되고 결국 윤이와 명서가 사랑하게 되고. 단이는 군에서 의문사하고, 미루는 거식증으로 죽는다. 배경은 1980년대로 읽힌다.

 

이 소설에는 수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우선 정윤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고 정윤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대학을 휴학한다. 윤미루의 언니 윤미래는 운동권인 남자친구가 의문의 실종을 하자 옥상에서 분신자살을 한다. 그 현장에서 자살을 만류하다가 미루는 손에 화상을 입고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니의 남자친구를 찾으러 다닌다. 단이는 특전사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해안경비병으로 파견나갔다가 거기서 의문사한다. 윤과 명서의 정신적 지주였던 윤교수에게도 청년시절 자살한 애인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명서는 같이 생활하자는 윤이의 제안을 거절하고 8년간 아무런 연락도 없이 떨어져 산다. "함께 있으면 너와 나는 아플 거다. 흉측하게 될 거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소설의 끝에는 윤교수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윤이와 명서가 만나고 사랑을 복원할 것을 암시한다. 작가의 메시지는, 윤교수가 죽으가며 손가락으로 제자들의 손바닥에 적어 준 글을 모은 문장에서 드러난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 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에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하나씩 통과해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래 누나가 불에 타고 난 후 미루와 나(명서)는 스스로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에밀리 디킨슨의 시)

 

말이 제 값어치를 잃어버린 시대, 그리하여 온갖 부황하고 폭력적인 말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나는 더이상 말에 대한 말을 하는 것에 의욕을 상실했습니다(윤교수의 편지 중에서).

 

그(명서)가 공허한 목소리로 어서 세월이 많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정윤, 하고 말했다. 용서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 아주 힘센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윤교수).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모양으로 변화할 것을 예고하는 일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희망이라고 했던 윤교수. 태어나서 살고 죽는 사이에 가장 찬란한 순간, 인간이거나 미미한 사물이거나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겐 그런 순간이 있다. 우리가 청춘이라고 부르는 그런 순간이.

 

청춘을 모범생으로 보낸 사람들이 읽으면 후회 또는 자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애써 잊고 있던 부채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춘이란게 원래 모범 답안이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청춘에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남은 인생에 청춘의 꿈을 잊지 아니한다면 우리의 인생도 아름다워질지 누가 알겠는가?

 

                          2010. 8. 8.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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