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0. 12. 5. 19:23

김훈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을 읽었다. 그가 쓴 <칼의 노래>를 시작으로 <현의 노래>, <남한산성>, <공무도하>, <강산무진>,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밥벌이의 지겨움>까지 읽은 것을 종합하면 그의 글에는 나를 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우선 그의 글은 정확하다. 어떤 대상을 표현할 때 남길 것도 보탤 것도 없이 그것만큼만 묘사한다. 아마도 기자 생활을 오래했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의 글은 건조하다. 주인공이 아무리 힘들어 해도 위로를 건네지 않고, 아무리 행복해도 축하를 표하지 않으며 작가의 입지를 굳건히 지킨다. 그의 글은 교훈을 전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그러하다고 할 뿐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등장한다.

연주=주인공. 20대 여자 화가인데, 민통선 안에 있는 수목원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되어 비무장지대의 꽃과 나무들을 세밀하게 그리는 업무를 맡고1년간 근무한다.

아버지=5급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뇌물죄로 3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가석방되어 있던 중 뇌일혈로 사망한다. 그의 뼈는 화장된 다음 주인공이 근무하던 민통선 안 숲에 뿌려진다.

어머니=남편이 가석방되었고 몸이 불편함에도 같이 살지 않고 간병인을 붙여준다. 남편의 장례식에는 슬피 운다.

김민수 중위=민통선 안에 있는 부대의 장교다. 한국전쟁 희생자 뼈 그림을 부탁하면서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다.

안요한 실장=수목원 연구실장인데 뛰어난 연구실적을 가지고 있지만 자폐증으로 남과 담을 쌓고 살며 그의 자폐증은 아들 신우에게 유전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기쁨은 최대한 억제되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슬픔 내지 무감각이 퍼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주인공의 어머니, 밤늦게 걸려오는 어머니 전화를 무덤덤하게 받는 주인공, 김민수 중위에게도 호감을 느끼면서도 그의 삶에 끼어들지 못하는 주인공, 자폐증 환자인 신우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번 안아주지 못하는 주인공을 만난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식물의 모든 외양은 본질과 관련이 있어 그 관련을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야.

 

여러 방면의 버스가 지나갔으나, 출소자 몇 몀은 버스에 타지 않고 정류장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석방은 수감보다 더 무거운 형벌처럼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핀 꽃들도 내 쪽을 향해 피어난 것으로 나에게는 보였다. 그것이 꽃과 꽃을 바라보는 사람 사이의 관계의 미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밖에서 나와는 아무런 인연도 관계도 없었던 무연고한 사물을 돌연 내가 맞상대해야 할 내 눈 앞의 당면 현실로 바꾸어 놓는, 말하자면 멀고 무관한 삼인칭인 '그'를 내 눈 앞의 이인칭인 '너'로 바꾸어놓는 이 지울 수 없는 구체성을 어떻게 迷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무들은 각자 따로 따로 살아서 숲을 이룬다는 것을, 가을의 서어나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숲은 나무와 잎으로 가득 차서 서걱이지만 숲에는 피의 인연이 없다.

 

사라진 것들의 부재를 그려서 사라지기 전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실장은 답사에서 '꽃들의 색은 저절로 비롯되는 것이며 연구자는 그 저절로의 과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절로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일은 저절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본다고 보이는 것은 아니고 보여져야 본다'는 식의 김훈 특유의 문체가 등장한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아니 하였다.

 

                            2010. 12. 4.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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