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성찰)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09. 10. 6. 20:23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을 읽었다. 저자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일컬어지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투사였고,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엠마우스'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고 한다.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다. 이 책은 피에르 신부의 자전적인 기록인데, 타인과 더불어 사는 기쁨이 곧 단순한 기쁨임을 강조한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든 집이든 그저 베푸셨더라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구원이다. 바로 이것이 희망인 것이다.

 

명철한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면 신비와 부조리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도리밖에 없어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가장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날 하늘나라는 이미 이 땅에 와 있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빛은, 그것을 원하는 자가 자기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며, 하느님의 어둠은 믿기를 거부하는 자가 구속받지 않을 만큼 충분하다.

 

사랑은 타인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존중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자기자신에게서 벗어남으로써 커지게 만드는 것이다.

 

진정한 해방신학이란 사랑 안에서 불의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사랑과 해방이라는 이 두 개념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진짜 죄는 우리가 어리석게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처럼 육욕의 결과가 아니라 자만심인 것이다. "나는 앞으로 하느님에게 의존하지 않겠다. 홀로 자족하리라"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거나 항거하는 것이다. 고통받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두 가지 태도 사이에서 주저한다.

 

다른 그 어떤 경험보다도 고통은 인간을 '부조리냐 신비냐'라는 거친 선택 앞에 몰아세운다.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두 가지 태도만이 바르다고 마음속 깊이 확신한다. 침묵하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 그것이다......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인생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절대로 망쳐서는 안되는 그 두가지 일은 사랑하는 것과 죽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사이에, 타인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우리의 행적, 다시 말해 우리의 행위가 우리 자신의 심판관이다. 왜냐하면 말이나 상상이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죄인인 우리에게는 용서가 절대적인 희망이다

 

용서는 인간적 정의를 실천하는 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영원한 휴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저자는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 용서, 공감 속에 기쁨이 있다는 저자의 삶을 한 순간이라도 닮기를.....

 

                  2009. 10. 6.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