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책에대한 책)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1'을 읽다.

자작나무의숲 2008. 8. 12. 20:49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1'을 읽었다. 저자는 미국 영화평론가인데 대학을 졸업한지 30년 정도 지난 후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학부생들을 위한 교양필수과목인 '현대문명', '인문학과 문학'강좌를 1년간 청강하였다. 이 책은 중년의 나이인 저자가 한참 어린 학생들과 함께 위와 같은 강좌를 청강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정리한 것인데, 1권에서는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르길리우스, 마키아벨리, 홉스와 로크 등이 소개되고 있다. 

 

인상 깊은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는 미디어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미지와 소리들이 실체를 가리고 대신하는, 그림자의 사회-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불렀던-로 빠져드는 미국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와 양상을 마뜩치 않아 한다.

 

그가 판단하기로, 미디어는 '지금 여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고, 사고의 호흡을 가쁘게 하며, 기억 용량을 대폭 축소시키고, 생활 리듬을 일희일비 속에 달뜨게 한다......그에게는 미디어의 대척점이 고전 읽기였다.

 

고전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가 우리 시대의 문화적 틀 속에 갇혀 경험하거나 생각해보지 못하는 것들을 접하게 한다. 결국 고전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우리가 반복적을 행하는 행위의 축적물이다. 탁월함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습성인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조화가 정의를 낳는다. 이 관념에 근거하여 플라톤은 각 기능을 할당했다.

 

어떤 경우에도 수호자들은 정직해야 한다. 토지나 재화, 금은제 식기류의 소유가 금지된 채 그들은 일반 군인들처럼 막사에서 생활하고 공동으로 식사한다.

 

플라톤은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따라 갈릴 때 국가도 분열한다고  결론 내렸다.

 

플라톤이 성공적인 국가에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공동체 정신과 탁월한 지적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우리는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내 아들들인 맥스와 토미처럼 그들은 미디어의 총아들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정체성이란 일시적일 뿐이라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권력은 타인에게 드러나는 무력함을 무능력의 증거로 지적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좌파의 시각에서 이렇게 권력을 재산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플라톤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급진적인 요소였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재산 개념은 보수적 신념의 근본이었다. 재산 소유자가 통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소유야말로 애착의 보증이요 수호의 보증이었던 것이다.

 

즐거움이야말로 핵심이자 거짓 없이 예술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사실 이 죄의 처벌에 있어 불복종에 대한 벌은 다름 아닌 불복종이었다......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들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요컨대 모든 위해는 한꺼번에 해치워야 한다. 위해를 맛보는 횟수가 적을수록 그에 대한 분노도 적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은혜는 백성이 오랫동안 맛볼 수 있도록 조금씩 나눠주어야 한다(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시민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사회계약에 관한 홉스의 아야기에서 그것은 최소한의 토대였다.

 

원래 속했던 공유의 상태로부터 그것을 취한 내 노동이 그것들에 대한 나의 소유권을 확립시킨다(로크).

 

고전의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저자의 비유도 낯설어 읽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학부생들에게 교양필수과정을 마련하여 고전읽기를 권유하는 컬럼비아 대학, 중년의 나이에 모교에 다시 돌아가 교양필수과정을 청강하는 저자의 용기를 읽을 수 있어 견딜만 했다.

 

             2008. 8. 12.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