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률

명분과 실리를 나누는 화해권고

자작나무의숲 2008. 6. 12. 21:00

한국전쟁 참전용사 단체와 전직 간부 사이에 예산 800만 원 정도를 횡령했으니 손해를 배상하라는 내용의 소송이 제기되었다. 제1심에서는 원고의 청구가 기각되었다. 제2심을 맡게 되었다. 제1회 변론기일에 재판을 종결하고 조정절차에 회부했다.

 

원고 대표자, 피고 모두 국가유공자이고 70세를 넘긴 분들이라 정중하게 모셨다. 녹차도 대접하면서 두분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잘 살고 있음에 감사를 드렸고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미흡한 점에 대하여서 공감을 표시했다. 두분은 거기까지는 공감했지만 정작 사건에 들어가면 의견이 대립되었고  감정의 반목을 드러냈다. 조정절차는 뚜렷한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원고의 요청에 따라 다시 재판을 열었다. 2명의 증인을 더 신문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피고가 예산을 횡령했다고 단정짓기는 힘들었다. 피고가 회계처리를 불투명하게 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리고 원고와 피고 사이에 이미 여러 건의 소송이 제기되었고, 형사고소도 제기되었던 점도 걸렸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에 호소한 화해권고결정을 내보기로 하였다.

 

화해권고결정문에서 우리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원고 대표자, 피고 두 분을 가리켜 영웅이라고 불렀다. 영웅 덕분에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점에 감사도 표시하였다. 덧붙여 영웅들이 싸우니 우리들로서는 갈 길을 잘 모르겠다는 아쉬움도 드러냈다. 혹시 이러한 분란이 제2의 한국전쟁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는 점도 밝혔다.

 

그리고 이성에 호소하여, 이 사건에 관하여 피고가 예산을 횡령했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동시에 피고가 회계처리를 불투명하게 한 점도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그런 다음 결론적으로 원고는 소를 취하하고 대신에 피고는 전직 간부로서 원고 단체에 찬조금 400,000원을 내라는 내용의 화해권고결정을 하였다. 14일을 숨죽여 기다렸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2008년 6월에 있었던 일이다.

 

격렬하게 다투는 당사자를 화해시키기란 참으로 어렵다. 먼저 양보하는 것이 진다고 생각할 때는 더욱 어렵다. 그럴 때 재판부가 제3자로서 바람직한 분쟁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당사자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화해권고 결정도 유용한 분쟁해결 수단이라 생각한다.

 

소송을 제기하는 목적은 다양하다. 그러나 크게는 명분과 실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명분이라 함은 피고가 잘못했다는 점을 공적으로 확인받고 싶다는 것일게다. 실리는 경제적 이익을 찾겠다는 것이다. 소송에서 실리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크게 오산하는 셈이다. 재판을 진행하다보면, 원고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원고의 입장에 공감을 표시하고 피고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유도하면, 돈은 상징적인 수준에서 지급을 명해도 분쟁이 종결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것을 명분과 실리를 나누는 화해권고라고 부른다. 한 당사자에게는 명분을 주고, 한 당사자에게는 실리를 준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원고는 피고가 회계처리를 불투명하게 했다는 점에 대한 확인으로 명분을 찾고 찬조금을 받음으로써 약간의 실리도 챙겼으며, 피고 역시 예산을 횡령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에 대한 확인을 받음으로써 명분을 찾은 셈이다.

 

판사란 타인의 인생에 특히 극적인 순간에 관여하는 사람이다. 분쟁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인생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없다면 자칫 그들 인생에 커다란 짐을 지우는 오판을 할지도 모른다. 시간이 갈수록 판사란 직업이 두렵다.

 

      2008. 6. 12. 부산에서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