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률

조정실에서 마신 녹차 한 잔의 힘

자작나무의숲 2008. 4. 18. 22:00

2008년 4월에 민사 2심 사건을 처리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원고는 피고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고 8,000,000원을 청구하면서 피고가 쓴 차용증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차용증을 작성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차용증을 써 준 이유가 다르다고 하였다 즉, 피고가 제3자에게 빌려 준 돈이 있었는데 원고가 대신 받아 주겠다고 하면서 편의상 차용증을 하나 써 달라고 해서 응했을 뿐, 8,000,000원을 빌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1심은 3,000,000원에 화해권고를 하였으나 피고가 거절하자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하였다.

 

원고의 항소로 2심이 열렸고 심리해본 결과, 원고가 피고에게 수백 만원의 돈을 빌려 주었던 사실, 피고가 4,200,000원의 돈을 변제한 사실 정도는 인정되는 데, 차용증과 같이 8,000,000원을 빌려 주었는지가 애매하였다. 다만, 원고가 피고에게 돈을 빌려 준 시기가 피고가 사업에 실패한 뒤로서 어려운 때였고, 피고가 원고에게 이자를 준 적이 없다는 점에 주목하여 조정절차에 회부하였다.

 

2주 뒤 조정실에 원고, 피고를 불러 서로 이야기를 하게 하고 재판장이 나서서 설득도 해보았지만 1시간이 지나도록 입장차가 좁혀지지 아니하였다. 피고는 몇 주 말미를 주면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정도였고, 원고는 재판장에게 조정안을 위임하겠다는 선에서 평행선을 그었다.

 

그만둬 버릴까도 생각해봤지만, 그 동안 들인 공이 아쉬워 마지막 수를  한번 써보자고 생각하고, 판사실 부속실 여직원에게 차 3잔을 주문 하였다. 부속실에는 차 시배지로 유명한 하동 녹차, 지리산 야생초로 만든 백초차, 지라산 산뽕잎차, 쟈스민차, 보이차, 커피 등등이 준비되어 있지만, 내심 이런 날은 하동 녹차가 제격인데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심전심인지 여직원은 하동 녹차 3잔을 내 왔다. 녹차를 마실 때까지 원고, 피고, 재판장 3인은 침묵을 유지하였다. 나는 먼 산도 바라보고 눈 앞에 있는 노트북도 보면서 녹차를 다 마셨다. 그리고 한 참 뜸을 들인 끝에 피고에게 '어려운 시기에 돈을 빌렸으면 이자는 줘야할 것 아니냐 150만 원 정도 주고 이 사건을 끝내자'고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오늘 조정이 성립되지 아니하고 판결로 가면 두 사람은 악연이 될텐데 앞으로 어찌 될 줄 알고 악연을 만들려고 하느냐'며 1990년 정훈장교로 근무했을 때 나를 서운하게 했던 참모장교가 있었는데, 15년 뒤에 재판장과 증인으로 만났던 이야기, 그 참모장교가 증언을 하고 며칠 뒤에 나에게 식사를 하자며 편지를 보낸 이야기, 그러나 서운했던 경험이 생각나 거절하고 우연히 사건검색을 해봤더니 그 참모장교가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곁들였다.

 

피고가 드디어 마음을 움직였다. 재판장의 조정안을 받아들이겠단다. 그래서 그 사건은 피고가 원고에게 1,500,000원을 주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완강했던 피고의 마음을 녹인 원인은 무엇일까? 악연을 만들지 말라는 재판장의 호소일까? 녹차 한 잔의 힘일까?

 

소설가 한승원이 '차 한잔의 깨달음'이라는 책에서 '차에는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탐욕과 오만과 미혹과 분노와 시기 질투와 복수심을 그치게(止)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밝고 맑은 지혜로써 세상을 깊이 멀리 높게 뚫어보게(觀)하는 것이다. 즉 지관의 약이라고 요약한다.'고 강조한 바가 있음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조정실에서 마신 녹차 한 잔이 피고에게 지관의 약이 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

 

                        2008. 4. 18. 부산에서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