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 중에서

자작나무의숲 2007. 7. 25. 22:15

2004. 6. 14. 읽은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 중에서 눈여겨 볼 만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법학자들은 법학자들대로 고고한 자신들만의 성에 혼잣말만 하며 살고, 법조인들은 법조인들대로 자기 특권 속에 안주하며 청지기의 소명을 저버리는 가운데, 우리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은 길바닥에 뒹굴게 된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국가를 사랑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가에 대한 '사랑 표현'을 강제할 수는 없으며, 국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중요한 것이 국가를 '통제'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국가를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 나라보다는 국가를 통제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나라가 그나마 '덜 나쁜'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통제해야 할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시민의 이익 대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게 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정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맡겨진 역할의 수행을 포기한 채,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 법률가들은 결국 괴물의 수족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절대로 가족적이서는 안 되는 것이 법조계입니다. 검사는 국가를 대표하여 범죄자와 싸움을 벌이는 존재입니다. 변호사는 무엇보다 의뢰인을 위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판사는 법리에 의해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독립성입니다. 사법연수원 기수에 따라 그 법률가의 위치가 좌우되는 풍토에서 독립성 보장이란 생각하기 힘듭니다.

 

적법절차를 강조하는 필자의 입장은, 첫째,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인정하고, 둘째,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임으로써, 셋째, 적법 절차 안에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원론적인 수준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헌법을 이해하는 열쇠말은 '인정한다. 그러나'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헌법은 '그림의 떡' 또는 '잘 포장된 한 장의 종이 쪽지'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권력자들은 누구나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인정한다. 그러나'의 논리를 들이대며 자기 눈에 거슬리는 것을 마음대로 제한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막지 못하면 이미 헌법이 아닌 것이지요.

 

한 번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야말로 진실을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서 피의자, 피고인이 갖는 가장 강력한 대화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검사에 비해서 아무 무기도 지니지 못한 나약한 피의자, 피고인이 그나마 존엄성을 지닌 채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는 절대적인 무기가 진술거부권인 것입니다.

 

말하지 않을 권리는 종교전쟁으로 인해 죽음 만한 사람이 다 죽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인 1791년에 가서야 미국 수정헌법 제5조의 자기부죄금지 특권(privilege against self-incrimination)을 통해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각종 차별이 삶의 현장 전체에서 일상화되어, 오히려 무감각하게 되어버린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이런 차별공화국의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 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김두식은 누구인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지검 서부지청 검사를 지냈다. 코넬대 법과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지금은 한동대 법학부에서 형법, 형사소송법, 사회보장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