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피에르 부르디외의 '텔레비전에 대하여' 중에서

자작나무의숲 2007. 9. 1. 21:18

1999. 9. 14. 읽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텔레비전에 대하여' 중에서 음미해볼 만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일부 우리 철학자들(그리고 작가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지각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존재한다는 것은 기자들에 지각되는 것이고, 이것은 곧 기자들에게 '잘 보임(이것은 타협과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내포함'을 뜻합니다.

 

텔레비전에 접근하는 것은 무서운 검열을 반대급부로 갖는 것입니다......최종적으로 텔레비전에 가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구속입니다. 이것은 텔레비전에서 일어나는 것이 텔레비전을 소유한 자, 그리고 광고비를 지불하는 광고주, 지원금을 주는 국가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상징적 폭력이라는 특별히 위험한 형식을 수행하는 텔레비전을 만드는 일련의 메커니즘을 논증해 보여 주고 싶습니다. 상징적 폭력은,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과의 암묵적인 공모로 행해지는 하나의 폭력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폭력을 가하는 것과 당하는 것을 서로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점점 더 텔레비전을 위한 시위, 즉 텔레비전 방송국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성격의 시위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들의 지각 범주에 맞을 때, 그들에 의하여 시위는 중계되고 증폭되어 최대의 효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단지 경쟁이 똑같은 구속요소, 같은 여론조사, 같은 광고주에 종속된 신문들과 혹은 기자들 사이에 이루어질 때 경쟁은 동질화된다고 봅니다.

 

저는 텔레비전이 思考의 표현에 매우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긴급성과 思考 사이에 부정적인 관계를 설정하였습니다.......思考는 정의상 전복적입니다. 思考는 통념을 명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그것을 논증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스튜디오 위에 올라온 모든 화자들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언변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말하게 될 때는(그는 장시간 발언권을 갖는 사람들조차도 생각지 못하는 엄청난 것들에 대하여 자주 말을 하곤 합니다) 말하는 연습작업을 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비와 좋은 날씨에 대해서 많이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서로 부딪힐 일이 없는 확실한 화제이기 때문입니다.

 

신문의 배포 범위가 확장될수록 신문은 더욱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주제들을 다루고, 기자들은 수용자의 지각 범주에 적합한 대상을 구성해 갑니다. 이 집단적 작업 전체는 균질화, 통속화되고, 순응적이고 탈정치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건사고는 정치공백화 현상을 만들고, 사회적 삶을 탈정치화시키며, 일화나 소문(스타나 왕족의 삶은 국내적 혹은 세계적인 사건이 됨)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오늘날 장들 사이에 힘의 관계의 변화는 점차 외부 평가 범주가 - 피보의 경우 매거진, 인물 소개 프로그램에서 인정받음 - 동료들의 평가를 누르는 것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누구인가?

프랑스 최고의 지성을 상징하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이다. 그는 비판적 후기구조주의의 이론가이면서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場과 아비튀스 및 문화자본, 상징폭력 등 그가 창안한 주요 개념들과 이론을 이미 수십 권의 방대한 저서를 통해 설명하고, 여러 분야에 걸쳐 응용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탈정치적, 혹은 대중 선동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민주주의 발전을 위협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텔레비전은 정보와 독점과 조종을 통해 민주시민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거나 왜곡시키는 검열을 한다. 부르디외는 오늘날 텔레비전이 '상징적 폭력'의 기제가 되어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판되자 마자 논쟁거리가 되면서 1년도 채 안되어 10만 부 이상 팔려나가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다고 한다. 일독을 권한다. 2007. 9. 1. 부산에서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