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하버마스의 '사실성과 타당성'을 다시 읽다.

자작나무의숲 2008. 2. 16. 13:26

읽어도 읽어도 그 뜻을 잘 모르는 책이 있다. 그런데도 자꾸 손이 가는 책이 있다. 나에게 위르겐 하버마스의 '사실성과 타당성'이 그런 책이다. 이 책은 담론적 법이론과 민주주의적 법치국가 이론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법률가들이 한번쯤 읽어 봐야 

하는 내용이어서 2001. 6. 6.에도 읽었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어 이번에 다시 읽었다. 이번에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메모 수준으로나마 정리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음과 같이 적어 본다.

 

우선 하버마스는 사회주의가 표방했던 '자유로운 생산자 공동체'라는 민주주의 모델을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자율적인 법적 공동체'라는 모델로 대체하고자 한다. 하버마스에게는 시민들의 소통, 이를 위한 정치공론장, 절차적 정당성과 같은 개념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에게 법은 사실성과 타당성의 매개 범주로 인식된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드라이어는 법체계가 법적 타당성을 갖기 위한 필수조건으로서 다음을 꼽는다. '첫째, 광범위한 사회적 효력을 가져야 하며, 둘째, 광범위한 윤리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하나의 규범의 법적 타당성은 다음 두가지가 동시에 보장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는 필요한 경우 제재를 통하여 강제되는 평균적인 규범준수라는 의미의 행동의 합법성이며, 다른 하나는 법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 규범 준수를 항시 가능하게 만드는 규칙의 정당성이다. 바로 여기에 규범의 법적 타당성의 요점이 있다.

 

사실성과 타당성의 긴장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행동에 영향을 주도록 조작화하는 근대법 개념 속에는 이미 루소와 칸트가 발전시킨 민주주의 사상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서 주관적 권리들로 구성되어 있는 법질서의 정당성 주장은 오직 모든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합치되고 통합된 의지가 갖는 사회통합력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는 사상이 이미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근대사회에서 사회적 통합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떠맡게 된 법이 사회적 재생산의 기능적 명령이라는 세속적 압력을 받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법은 모든 규제를 정당화해야 하는 이를테면 이상주의의 압력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근대법은 자신의 정당성을 국민주권의 원리에 기초하는 입법절차로부터 끌어온다. 합법성으로부터 정당성이 발생하는 이 역설은 시민들에게 정치적 자율성의 행사를 보장해주는 권리들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왜냐하면 민주적 입법절차가 보유하는 정당화의 힘은 오로지 시민들의 공동삶을 규제하는 규칙들에 관하여 시민들 스스로 수행하는 상호이해의 과정으로부터만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과 국민주권 원리가 근대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을 형성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법코드의 법적 제도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느끼는 모든 인격체가 자신의 이의제기를 관철할 수 있는 법률적 수단이 보장되어야 한다.

 

구성원 권리와 법률적 수단의 보장에 대한 권리를 동반한 평등한 주관적 행동자유의 권리가 법코드 자체를 확립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권리들이 없다면 정당한 법은 없다.

 

가치지향적 행동의 경우에는 행위자는 합의를 추구하거나 합의에 의존한다. 이익지향적 행동의 경우에는 이익균형이나 타협을 추구한다.

 

합의와 중재는 갈등해결의 두 유형을 대표하는 표어이다.

 

실정법이 법의 고유한 기능인 행동기대의 안정화를 위해 수행하는 일은 법적 안정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의사소통적 권력은 어느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행동할 때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며, 사람들이 다시 흩어지면 그 즉시 사라진다.

 

민주적 절차는 법의 정당성을 근거지어야 한다.

 

법은 의사소통적 권력으로부터 행정권력으로의 변형을 위한 매체이기도 하다. 정당한 법은 의사소통적 권력으로부터 나오고 의사소통적 권력은 다시 정당하게 제정된 법을 통해 행정권력으로 번역된다는 원리의 도움으로 법치국가의 이념을 전개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자율적 공론장의 보장이라는 원리와 복수정당의 원칙이 첨가되어 대의원리와 결합할 때 비로소 국민주권의 원리의 내용이 완전해진다.

 

법정은 자신의 판결을 무제한적인 법적 공론장의 원리 속에서 정당화해야 한다.

 

번복불가능한 결과를 가져오는 다수결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는 다음과 같은 해석에 기초한다. 즉 소수파가 훗날 더 나은 논지를 사용하여 다수자가 되고 이미 내려진 결정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조건 아래서만 다수자의 결정에 승복한다는 해석에 기초한다.

 

판결이 법질서의 사회통합적 기능과 법의 정당성 주장을 모두 충족하려면 일관성 있는 판결과 합리적 수락가능성의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그러나 두 조건이 직접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판사의 판결 속에 두 기준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한편으로 법의 안정성 원리는 판결이 현존하는 법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일관성 있게 내려져야 한다고 요구한다......다른 한편 법질서의 정당성 원리는, 판결이 과거에 있었던 유사한 판례나 현행 법체계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판결이 법적 인격체들에게 합리적인 판결로 수락될 수 있기 위해서는 문제의 쟁점과 관련하여 이성적으로 근거지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드워킨은 주관적 권리를 집합적 목표설정에서 비롯하는 불이익에 대항하여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방어하는 게임에서 개인이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으뜸패와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어떤 사회적 목표도 권리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결론이 권리에 대한 정의로부터 나온다.

 

규칙과 원리로 구성된 실정법에 대한 드워킨의 모델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모델은 모든 법적 인격체들에게 평등한 배려와 존경을 보증하는 상호  인정관계의 침해불가능성을 담론적 정당화를 통해 보장한다.

 

판사 헤라클레스는 이상적 지식의 두 가지 구성요소를 보유한다. 그는 정당화에 필요한 타당한 원리와 목표설정을 모두 알고 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그의 눈 앞에 있는 현행법을 구성하는, 논증의 실을 통해 엮어진 요소들의 두터운 연결망을 완전히 조망하고 있다.

 

규범을 공평무사하게 적용할 때 비로소 개별 사건에 대한 타당한 판결이 나올 수 있다. 규범의 타당성만으로는 개별 사례에서의 정의를 보증하지 못한다. 규범을 공평무사하게 정당화하는 맥락에서는 통상 미래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빈틈이 생기게 마련인데, 규범의 공평무사한 적용은 이 빈틈을 메워준다. 적용담론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는 규범의 타당성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적절한 관계이다.

 

절차법은 규범적-법적 논증 자체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적용 담론의 논리를 따르는 의사소통 과정이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도록 만드는 제도적 틀을 시간적, 사회적, 객관적 차원에서 보장한다.

 

상소의 목적은 일차적으로는 당사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판결의 재심을 통해 올바른 따라서 정의로운 결정을 얻는 데 있다. 그 외에 재심이 가능하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법정은 '조심스러운 정당화'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상소의 목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목적은 효과적인 상소체계에 대한 일반적 관심에도 있다. 자구책의 금지는 관련 당사자들이 옳은 결정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특정한 보증이 있을 때에만 효과적을 실현될 수 있다. 더욱이 상소제도는 정당화가 상급법원에 궁극적으로는 최고법원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시급하게 요구되는 법의 조화와 심화발전을 가져온다.

 

사람들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겠다고 합리적으로 결심할 수 없다.

 

실제로 시민사회에 기초한 공론장과 법치국가의 원리에 따라 제도화된 의회에서의 의견형성과 의지형성(그리고 법정에서의 재판) 사이의 상호작용은 토의정치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번역하는 데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공론장의 의사소통 구조는 사적 생활영역과 연결되어 있어서, 시민사회적 주변부가 정치의 중심부에 비해 새로운 문제상황을 지각하고 확인할 수 있는 감수성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다.

 

무대의 배우는 청중석의 호응 덕분에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이 바로 그 법칙성이다. 합리화된 생활세계가 강한 시민사회적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자유로운 공론장의 형성을 지원하는 한, 공적 논쟁이 상승기류를 타면서 입장을 표명하는 공중의 권위가 강화된다.

 

정당치 못한 권력의 자립화와 시민사회와 정치적 공론장의 허약성은 '정당화의 딜레마'로 악화될 수 있으며, 이 딜레마는 경우에 따라선 조절의 딜레마와 연결되어 악순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정치체계는 정당성의 결함과 조절의 실패가 서로를 강화시키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전문가들이 개별적인 법규를 법체계 전체의 맥락 속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에 대한 당대의 지배적인 선이해와 지평 속에서 해석하기도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행위자들이 자신의 결정과 그 근거들을 통해 무엇에 대답했고 또 대답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가진 암묵적인 사회 이미지를 알아야 하며, 또 그들이 법체계의 실현이라는 과제에 비추어 당시의 사회구조와 성과, 잠재력과 위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헨리 J. 슈타이너는 판사가 가진 암묵적인 사회 이론적 표상을 사회적 비전이라 부른다.

 

사회복지 모델 속에 반영된 것과 같은 변화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법적 자유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리를 실체화하고 새로운 권리유형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서비스를 제공하고 삶의 기회를 배분하는 사회복지국가는 고용, 생활보장, 의료, 주거, 최저소득, 교육, 레저, 삶의 자연적 기초들을 보장함으로써 처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개인의 생활 속 깊이 침투하는 이러한 급부 때문에 사회복지국가는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할 위험을 안고 있다.

 

법질서는 시민들의 동근원적인 사적 자율성과 시민적 자율성을 평등하게 보장하는 한에서 정당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법의 정당성은 오직 그 속에서만 이 자율성이 표현되고 입증될 수 있는 의사소통 형식으로부터 나온다.

 

불의란 무엇보다도 두 가지 형태의 구속, 억압, 지배를 의미한다. 이 구속 중에는 분배적인 유형도 있지만, 분배논리와는 잘 맞지 않는 다른 요소들도 있다. 의사결정절차와 분업 그리고 문화가 그런 것이다.

 

복지자본주의사회는 매우 새로운 지배유형을 만들어냈다. 일상적 노동과 삶의 행위들이 점차 합리화된 관료적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삶의 여러 영역에서 전문가의 견해나 관련 당국의 방침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지화된 종속이 극복되지 않는 한, 특혜대우의 정책은 그 의도가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단지 해당직업에서 여성이 남성과 비슷한지 아닌지가 문제의 초점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이 생물학적 차이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재정의할 수 있는지, 젠더가 사회적 구성물이라면 이것을 재정의해서 그 차이들이 직업적으로는 의미없는 것이 되도록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법의 민주적 발생의 핵심은 법적으로 제도화된 국민주권과 제도화되지 않은 국민주권의 전면적인 조합과 상호매개이다......그것은 시민사회외 공론장으로부터 나와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의사소통적 권력으로 전화되는 의사소통의 흐름과 공적 영향력 속에 있다. 이 맥락에서 중심적 의미를 갖는 것은 자율적인 공론장을 보호육성하고, 시민참여를 확대하며, 미디어의 권력을 제어하는 것, 그리고 정당이 국가의 시녀가 아니라 매개적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진되어 가는 생태경제의 자원과 해체되고 있는 사회적 연대의 자원이야말로 부양이 필요한 자원이다. 오늘날 사회적 연대의 힘은 의사소통적 자기 결정의 형태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법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근대 법질서는 자신의 정당성을 오직 자기 결정의 사상으로부터만 끌어올 수 있다. 시민들은 법의 수신자로 법에 종속되어 있지만, 동시에 항상 자신을 그 법의 저자로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적 과정이 정당화의 짐을 모두 짊어진다. 그것은 법적 주체의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을 동시에 보장해야 한다.

 

독서백편의자현이라는 말이 있듯이 계속 읽다보면, 어렴풋이 이해되는 개념이 있으리란 기대를 하며 이 글을 마친다. 

 

          2008. 2. 16. 부산에서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