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미디어의 이해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2. 2. 28. 08:00

1. 개괄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를 읽었다. 저자는 캐나다 태생으로 1964년 이 책을 출간에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여기서 다루는 미디어는 라디오, 텔레비전을 비롯하여 인쇄, 영화, 전신, 신문, 광고 등 여러 가지다. 이 책은 안 읽었어도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이 책의 명제는 다 알고 있으리라. 미디어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가 된 지금 저자의 선견지명을 읽을 수 있다.

 

2. 발췌

니체가 통찰한 것처럼 이해는 행동을 중단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확장시키고 우리 안팎에서 이 같은 각종 갈등을 일으키는 미디어를 이해함으로써 이 갈등의 격렬함을 완화할 수 있다.

 

모든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대응, 즉 <중요한 것은 미디어들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이다>라는 식의 대응은 기술에 대한 백치의 감각 마비 상태이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내용이란, 강도가 정신을 지키는 개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맛있는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효과가 강렬해지는 것은 또다른 미디어가 내용으로 주어진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내용은 소설이나 연극 혹은 오페라이다. 영화라는 형식의 효과는 그것의 프로그램 내용과는 무관하다. 글쓰기나 인쇄의 내용은 말이다. 그러나 독자는 전적으로 인쇄인지 말인지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다.....전화는 차가운 미디어, 혹은 저밀도의 미디어이다. 왜냐하면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어서 듣는 사람이 보충해야 하는 연설은 저밀도의 차기운 미디어이다. 반면에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별로 없다. 따라서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의 참여도가 낮고, 차가운 미디어는 참여도가 높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전기 시대의 근본적인 변화는 의미보다는 효과에 관심을 더 두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효과는 전체적인 생활을 포함하는 것이지 정보 이동이라는 단일한 수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인텔리겐치아는 낡은 권력과 새로운 권력 간의 연락자 겸 중재자 역할을 했다.

 

발끝으로 서는 자는 확고하게 서지 못한다.

가장 긴 보폭으로 걷는 자는 가장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자 하는 일을 뽐내는 자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는 자는 오래 세월을 견뎌내야 하는 일을 해낼 수 없다(노자 <도덕경>)

 

19세기의 공업 기술을 바탕으로 계급 해방의 기조를 상정하고 있는 그들을 볼 때, 생산수단 못지 않게 언어라는 미디어가 사회발전을 형성한다는 사상만큼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을 파괴시킨 것은 없을 것이다.

 

전신이 신문이라는 미디어를 재편한 이후 신문이 인간적 흥미라는 새 기조를 열었을 때, 신문은 마치 텔레비전이 영화와 나이트클럽에 치명타를 가했듯이 연극을 말살시켰다.

 

언어는 명료화하는 기술이다. 언어는 직접적인 감각 경험을 음성 상징으로 번역해, 순간적으로 드러내고 복원해 놓는다.

 

사회분업론의 저자 에밀 뒤르켐은 전문화된 직무가 사회적 양심에 입각한 행위로부터 언제나 도피한다는 생각을 이미 오래전에 개진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가는 사회의 양심이며 따라서 그에 걸맞게 대우받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대중 속에 있다는 즐거움은 숫자가 많다는 것이 주는 쾌감이며 이것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어렴풋이 인식되어 왔다.

 

지위와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과시적 소비를 보여주는 데에는 미국의 경제학자 베블렌의 진술보다는 신문사 카메라 맨의 역할이 더 컸다.

 

정보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정치는 대표를 선출하여 결정권을 위탁하는 경향에서 벗어났다. 전 사회 공동체가 의사 결정이라는 중추적 행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다.

 

균형을 맞춰 효과를 내고 좋은 뉴스를 팔기 위해서는, 많은 나쁜 뉴스들이 필요하다. 게다가 신문은 뜨거운 미디어이다. 강도를 높이고 독자의 참여를 높이려면 나쁜 소식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가장 먼저 시선을 가져가는 대목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관계있는 내용이다......왜냐하면 이성을 가진 우리 인간들은, 경험을 새로운 구체적인 형태 속에서 보고 재인식하는 일이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인생의 기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문자적으로 전환된 경험은 우리가 이전의 인식을 재생해 볼 수 있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이윽고 신문은 뉴스거리가 단지 알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아질 수도 있고 또한 정말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미디어의 소유자들은 항상 대중에게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나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위와 기만이 광고 카피라고 이야기하면서 광고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광고주에게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이는 금주주의자와 양조업자, 검열자와 책 영화의 관계와 같다. 반대자야말로 최대의 환영자이며, 촉진자인 것이다.

 

어떤 형태의 핵심적 본질을 알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 형태를 익숙하지 않는 환경에 두었을 때 나타나는 효과를 연구하는 것이다.

 

라디오가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힘을 널리 지니고 있다는 것은 숙제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젊은이들이나 군중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라디오를 들고 다니는 많은 사람들의 예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이다. 그리고 만화적 인물도 매우 진지하게 다룬다.

 

라디오는 쓰는 사람-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말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개인  대 개인으로 상대할 때처럼 친근하게 다가간다. 이것은 라디오의 직접적인 측면이다. 즉 개인적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전화 또는 전신보다 훨씬 더 라디오는 충추신경조직의 확장이다. 이에 필적하는 것은 인간의 말뿐이다.

 

텔레비전은 날카로운 개성을 거부하고 완제품보다는 과정을 제공하는 것을 좋아하는 미디어이다. 텔레비전은, 말쑥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보다도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적합하다.

 

일단 이들 검영관들이 어떤 경우에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것을, 또한 미디어가 여러 가지 영향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내용을 통제하지 않고 이번에는 거기에 쏟던 정열로 미디어 자체에 대한 억압에 나서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 미디어는 과정과 복잡한 반응이라는 주제를 요구하는 미디어이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형식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겉모습에서 역할과 지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람은 텔레비전에 어울리지 않는다. 교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의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한 비지니스맨처럼 보이기도 하는 등, 동시에 여러 가지 전부로 보이는 사람이 텔레비전에 어울린다.

 

뜨거운 영화 미디어는 어떤 타입인지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는 인물을 필요로 한다. 차가운 텔레비전 미디어는 전형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한 것들은 시청자가 이미지를 종결하거나 완성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직능 job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역할 role이 다시 나타난다.

 

매스 미디어 역시 그 수용자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매스 미디어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동시에 관여하기 때문에 매스미디어인 것이다.

 

3. 소감

SNS 미디어에 관하여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이해하면 SNS에 대한 이해도 이 책에 대한 이해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다. 핵심을 몰라 장황하게 인용하였다.

 

                   2012. 2. 28.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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