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위험사회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2. 3. 6. 20:45

1. 개괄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읽었다. 저자는 독일 뮌헨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밤베르크대학 정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책은 부제가 '새로운 근대를 향하여'인 데서 드러나듯, 근대화 과정이 위험사회로 귀착되므로 사회가 실제로 진화하려면 반드시 성찰적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위험사회로서 현대 산업사회의 위험성은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1) 현대의 위험은 방사선과 같이 인간의 평상적 자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난다 (2) 위험의 사회적 지위가 나타난다 (3) 위험의 확산과 상업화는 자본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다. (4) 부는 소유할 수 있지만 위험으로부터는 그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5) 사회적으로 공인된 위험은 특수한 정치적 폭발력을 지닌다. 

 

2. 발췌

사회적 합리성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  

 

고전적 산업사회에서는 부 생산의 논리가 위험 생산의 논리를 지배했다면, 위험사회에서는 위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이 그 논점이다.

 

위험사회에서 근대성의 원리는 산업사회에서 감내해야 했던 그 분리와 한계에서 벗어난다.

 

체계적으로 말하자면 시간 차는 있을지라도 근대화가 지속되는 중에 부를 분배하는 사회의 사회적 지위와 갈등은 위험을 분배하는 사회의 그것들과 결합되기 시작한다.

 

평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다수의 위험지위들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다. 평균적으로는 무해한 납과 같은 물질들이 치명적 위난이 되는 집단과 생활조건이 있지 않을까?

 

위험은 우선 회피해야 하는 재화이며,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에 따라 부정되기 전까지는 그 비존재성이 암묵적으로 전제된다.

 

위험분배의역사는 부와 마찬가지로 위험이 계급유형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이다. 즉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

 

인식가능한 부와 인식불가능한 위험 사이의 경주에서 후자는 승리할 수 없다. 가시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과 경쟁할 수 없다. 역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가시적인 위험의 승리를 선언한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계급지위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지만, 위험지위에서는 반대로 의식(지식)이 존재를 규정한다.

 

최대농축법은 대단히 모호하고 위험스러운 기술관료적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 즉 (아직) 포괄되지 않았거나 포괄될 수 없는 것은 유독하지 않다는 것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인간의 위험한 개입에서 독극물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위험사회는 따라서 혁명적 사회가 아니라고, 그보다는 파국적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긴급사태가 정상사태가 될 우려가 있다.

 

불평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사회적 위험의 개인주의화라는 견지에서 재정의될 뿐이다.

 

산업세계에서 상대방의 직업을 알면 우리는 그 또는 그녀를 안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여러 가지 기능들은 최소한 특별한 영역들에서는 이미 전자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따라서 탈집중적으로 조직될 수 있고, 말하자면 지리적으로 확산될 수 있으며 또는 심지어 지리와 무관하게 될 수도 있다.

 

만일 노동시간과 노동장소의 탈집중화의 이러한 결과들을 총제적으로 고려하면, 실업이라는 급진적 대안을 가지고 있는 단일한 산업지에 조직된 평생 전일직의 단일체계에서 유연하고 다원화하고 탈집중화한 저고용의 위험천만한 체계로의 이행이 산업사회에서 진행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은 위험을 유발하는 원인들 중의 하나이며, 위험을 정의하는 매체이자 그 해결책의 원천이다.

 

사람들이 만든 것은 사람들이 바꿀 수도 있다. 과학적 합리성이 스스로 부과한 금기들을 가시적이고 의문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찰적 과학화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험사회는 또한 잠재적으로 자기비판적인 사회이다. 그곳에서 비판의 준거점과 전제조건은 언제나 위험과 위협의 형태로 생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핵에너지는 기술발전에 복속된 무오류성을 따르는 위험천만한 게임이다.

 

정치는 의회, 정부, 정치적 관리라는 공식적 장에서 조합주의의 회색지대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이익집단의 조직된 힘이 미리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은 자신의 창조물로 방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모든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정당의 지도부는 정치사업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그네타기 유권자(swing voter)의 증가로 혼란에 빠졌다.

 

정치적 근대화는 정치를 탈권력화하고 해방하며 사회를 정치화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근대화 과정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하위정치의 중심들과 행동영역들이 체계에 맞서거나 동의하여 의회를 벗어나는 감시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반세기도 더 전에 톨스텐 베블렌은 경제법칙이 언제나 타당한 것은 아니며 사회의 문화체계와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우에 포퍼는 진정 옳다. 즉 비판은 분명 진보를 의미한다.....형태가 어떻든지 간에 자기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위난이 아니라, 조만간 이 세계를 파괴할 지도 모르는 잘못을 미리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3. 소감

동시대를 분석할 수 있는 유용한 개념 하나를 얻었다. 근대화 다음에 성찰이 아니라 성찰과 동시에 근대화를 이루는 방법은 무엇일까?

 

           2012. 3. 6.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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