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인권 변론 한 시대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8. 9. 08:00

인권변호사 홍성우의 증언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한인섭 교수와 대담하는 형식으로 정리한 <인권변론 한 시대>를 읽었다. 홍성우 변호사는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로 있던 중 1971년 이른바 제1차 사법파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후 변호사로 개업하여 1974년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인권변론에 투신하였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결성하고 그 대표를 역임하였다. 한인섭 교수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시위전력을 이유로 면접시험에 탈락한 경험을 갖고 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책은 홍성우 변호사가 보관하던 변론기록 4만 6천 쪽 분량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기증하였고, 한인섭 교수팀이 이를 정리한 후 홍성우 변호사를 상대로 질문하고 답변을 들은 내용이고, 부록으로 인권변론 연보를 실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법이 정치적 억압의 도구로 작용하고 정의를 대변하지 못할 때, 그 시대를 직시하는 변호사로서 어느 한쪽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지요

 

젊어서 뜨거운 좌파였다가 연륜이 쌓이면서 젊은 날의 객기나 이런 게 없어서 중도적인, 중도우파적인, 때로는 극우적으로 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이념이라는 게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념에 대한 신봉이나 신념 같은 건, 사회과학이나 철학으로 만들어낸 이념이라는 건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신도 내 나라를 다른 사람만큼 사랑하고 있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과 달리 내 나라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면서 자기는 나라를 사랑하되 눈을 감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뜨고 현실을 직시하며 나라를 사랑하고 있고, 입을 다물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하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며, 머리를 숙이면서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떳떳하게 나라를 사랑한다(차다예프 <미친놈의 변사> 중에서)

 

양심선언의 방법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지요. 지학순 주교가 처음 개발하였고, 그를 이어받아 운동 차원에서 양심선언 제창운동을 전개하는데 적극적 역할을 한 이는 김정남 씨였다고 알고 있습니다.....공안당국에 끌려가 고문당하면서 억지로 진술한 것 때문에 언제까지 양심의 괴로움을 받아야겠느냐, 그러니 연행되기 전에 나의 행동과 뜻은 이랬다 하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나면, 나중에 고문이나 협박 때문에 본의에 없는 진술을 해도, 그 양심상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당국의 용공조작 등과 싸울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취지이지요.

 

내일 주의 성탄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에게 모두 축복이 내리고 나를 그렇게 미워하고 박해하고 구박하는 현 정부 최고 지도자 박정희 선생과 중앙정보부 모든 고급 요원들에게 가슴과 머리 위에 흰 눈처럼 은총이 폭폭 쏟아지기를 빕니다. 자비로운 은총이......(김지하 최후 진술 중)

 

김지하 시 '타는 목마름으로'가 세상에 햇빛을 본 게 법정에서인 것입니다.

 

변호사는 그렇습니다. 피고인을 믿어주어야 하는 직업입니다. 틀림없이 이 사람이 알았을 것 같은데, 내 앞에서도 모른다고 하면 변호인은 그대로 믿어줘야 해요.

 

판결을 바꾸지 못해도, 사건의 동기를 이해하도록 하고 그 사람들의 진정성을 파급시킴으로써 죽이지 못할 분위기를 사회적으로 만들어냈고, 그럼으로써 사형을 막아낸 거에요(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아무리 검사가 작성한 것이지만, 이 조서내용에 임의성 있는 진술이라고 볼 수 없다, 증거능력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해서 파기환송된 거지요....이일규 대법원판사가 주심이었어요. 이일규 씨가 법조계에서 존경을 받는 이유 중에 아마 송씨일가 간첩사건의 판결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자기 소신이 옳았고, 소신을 꺾지 않는다는 데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70~80년대에 법정변론을 하면서 나의 주된 역할이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왔어요.

 

일방적인 거부, 금압의 풍토 속에서 어떻게 극복의 논리가 나올 수 있겠느냐(문용식 최후 진술 중)

 

재판 거부한다고 할 때 제일 곤란해요. 변호사는 재야법조인이지만 재판이라는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변호사인데, 재판 자체를 거부하고 그러면 변호사도 설 자리가 없지요.

 

이 사람이 왜 정당한지 비록 악법에 의해서 정권의 부당한 소추에 의해서 법정에 섰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은 자기가 정당하고 법정에 처벌받을 이유가 없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데, 왜 정의롭고 정당한지 그거는 밝혀야죠. 고문받았다면 그 사실도 구체적으로 주장해서 기록에 남기고요. 그것을 알리고 역사에 남기는 방법은 재판을 받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저 끔찍하고도 무서운 고문을 감행하는 것입니다.....그것은 기만, 자기기만과 강제되는 타인기만의 조직된 제도 위에 서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조장되고 있는 이기주의, 소시민적 안일과 탐욕 그것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했다는 증거는 댈 수 있어도, 안 했다는 증거는 댈 수는 없는 거에요....안했다는 유일한 증거란 원래 알리바이 뿐이에요. 현장부재증거.

 

피고인에게는 변호사를 자주 볼 수 있다는 자체로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접견은 귀찮다는 생각은 안하고 매일같이 구치소에 다니고 했어요.

 

양심과 인간성 회복을 위해 용감히 서 있는 권양을 주님이 은총으로 보살펴 주시리라고 믿고 기도합니다. 아무쪼록 용기를 잃지 말고, 진리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건강하길 빕니다(김수환 추기경 편지)

 

"김수환 추기경이 권양에게 격려 편지"라는 제목으로 사회면에 아주 짧게. 그게 권양 문제가 우리 언론에 보도된 최초입니다.

 

문귀동 재정신청사건 재항고한 시점부터 무려 15개월이나 지나서 대법원이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재판을 지연하는 것은 정의를 거부하는 것'라는 고전적 법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네요.

 

한 두 사람의 용감한 고발이나, 또 내부고발자 등의 용기라는 게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겁니다. 그 용기가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인 거지요.

 

역시 법정에서는 논리적인 전개가 제일 중요합니다. 판사가 누구든 간에 논리적 전개를 통해 판사를 설득시킬 수 있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지요. 말하는 기교나 기술이나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말하는 태도도 중요하고, 전체적으로는 변호사의 변론의 진정성 같은 게 중요합니다.

 

"이부영이 잡히면 이돈명 변호사 집에 은신해 있었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김정남) / "응 그러지 뭐, 우리 집에 있었다고 그래"(이돈명 변호사).....징역 8월을 선고했는데 이돈명 피고인이 상소하지 않은 것도 금도를 발휘했다고 보여지네요(이부영은 실제로 고영구 변호사 집에 은신해 있었으므로) / 장발장의 범행을 숨겨준 미리엘 주교에 대하여 범인은닉죄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한가. / 고영구 변호사는 추운 겨울에도 불을 안 때고 살았지요. 이 변호사에 대한 죄스러움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받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변호활동을 할 때는 남다른 도덕적 단련이 필요하다....당시 골프는 특권층의 운동이라 할 만한데, 내가 변론을 통해 고통에 동참해야 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골프라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어떤 사건을 하더라도 공명심 때문에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법조인들이 한번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어떤 이에게는 부끄러움을, 어떤 이에게는 용기를, 어떤 이에게는 위로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1. 8. 9. 진주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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