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

자작나무의숲 2011. 7. 18. 22:11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었다. 저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 영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이 소설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콘스탄틴 카바피의 시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고 한다. 시를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부 사람들이 변경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더 이상 야만인들이 없다고 말했다.

야만인들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어느 제국의 변방의 치안판사인데, 야만인 아버지와 함께  잡혀 온 야만인 딸을 동정한 나머지 그녀를 부족에게 데려줌으로써 제국주의자인 죨 대령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감옥에서 나와 사실상 치안판사의 역할을 다시 하게 된다. 주인공은 죨 대령이 폭력적인 수단으로 제국을 유지하려는 데 대하여 비판하지만, 자신도 온정적인 수단으로 제국을 영속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상 깊게 읽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교구세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주고 여기에 있는 하급관리들을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1주일에 두 번씩 법정업무를 주재한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의 것을 바란 적이 없다.

 

나는 평화로운 게 좋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게 어쩌면 좋은 것일 게다.

 

문명이라는 게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문명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서 행정업무를 수행했다.

 

내가 그녀를 상처받고 손상된 몸을 가진 불구자로 본 반면, 그녀는 지금쯤 자신의 불완전한 몸에 익숙해져, 고양이가 손가락 대신 발톱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것처럼, 더 이상 불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일까, 아니면 그녀의 몸에 배여 있는 역사의 자취일까?

 

나는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것보다 차원이 높은 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말았어야 한다. 그들은 그녀의 아버지를 발가벗겨 그녀에게 보여줬고, 그가 고통으로 덜덜 몸을 떨게 만들었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법적 절차라는 건 단순히, 많은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다.

 

내가 왜, 나의 적들이 할 일을 그들을 위해 해야 한단 말인가? 만약 그들이 내 피를 보고 싶어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그것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도록 만들자.

 

너는 이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있어!.......짐승에게도 망치는 사용해선 안 돼!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들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을 대하고 있다는 걸 알도록 만들자! 무서우면 무섭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자! 저 자들은 완강한 침묵을 먹고사는 인간들이다. 침묵을 지키면, 저 자들은 개개인에 대해, 그들이 인내심을 갖고 열여야 하는 자물통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자! 가슴을 열자!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대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끝장이 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시대를 연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부당하게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을 목격한 사람들이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어 있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행방불명된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시간과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 이런 일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야만인들의 죄는 추상적으로 제기되는 반면, 야만인을 다루는 과정에서 저지르는 문명인의 범죄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011. 7. 18. 진주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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