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개혁

변화의 시대에 판사로 사는 방법

자작나무의숲 2007. 1. 6. 14:43
 

변화의 시대에 판사로 사는 방법

1. 앨빈 토플러의 경고

  앨빈 토플러는 최근 저서 ‘부의 미래’에서 속도의 충돌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미국에서 기업은 가장 빠르게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데 반해, 법은 가장 느리게 시속 1마일로 달린다고 비유하면서, 미국의 당면한 문제는 빠르게 성장하는 신경제의 요구와 구 사회의 타성적인 조직구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경고하였다. 대한민국은 어떨까?

  대법원장님의 취임 이후 숨이 가쁠 정도로 변화를 추구한 것 같은데, 2006. 12. 26. 한국개발연구원이 작성한 ‘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조사’에 따르면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10점 만점에 4.3점에 불과하여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신뢰도인 4.0점을 겨우 넘는 수준이고,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4.5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2. 활로 모색

  법원사람들이 얼마나 청렴한지, 얼마나 유능하고 성실한지를 잘 알고 있는 필자는 국민들이 법원에 대하여 충분한 신뢰를 보내지 아니하는 이유에 관하여 오랫동안 궁리하였고 사회지도층 범죄에 대한 엄정한 양형 등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2005. 2. 21.부터 현재까지 형사부를 맡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앨빈 토플러가 ‘제3물결’에서 말했듯이 대한민국도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를 기반으로는 제2물결 문명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제3물결 문명으로 진화한 지 오래인데, 법원도 제3물결 문명에 걸맞게 개개 사건에 맞는 처리 즉 사법의 개별화를 해보면 어떨까? 재판절차 및 결과를 투명하게 해보면 어떨까? 재판절차에 법원 외부에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할 수는 없을까? 범죄의 결과만 보고 형을 정하는 것을 넘어서 범죄의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치유할 방법은 없을까? 사법이 감동을 창조할 수는 없을까?

3. 사법의 개별화 사례

  가. 가정폭력 상담 조건부 보석

      필자가 속한 재판부(항소부 및 합의부 겸임)에 가정폭력 사건 2건이 비슷한 시기에 배당되었다. 한 건은 야구방망이로 아내를 때려 상해를 가한 죄로 1심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항소한 사건이고, 다른 건은 아내를 때려 상해를 가하였거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을 태우려다가 미수에 그친 내용으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둘 다 피해자들이 피고인의 선처를 호소하고 있지만, 재범의 가능성이 걱정되는 사건이었다. 재판부는 고민 끝에 가정폭력 상담 및 치료 프로그램 이행을 조건으로 보석을 허가하기로 하였다. 피고인들로 하여금 가정폭력상담소에서 장기간에 걸친 상담 및 치료 프로그램을 이행하게 하고 그 결과를 양형에 반영해보자는 취지였다. 피고인들은 창원가정폭력상담소에서 6개월 과정의 프로그램에 따라 개별상담 및 집단상담, 피해자와 대화의 시간 등을 거쳤다. 가정폭력상담소가 재판부에 보내온 의견서는 20쪽이 넘을 정도로 자세하고도 깊이가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한 명에 대하여는 재범가능성이 낮다는 의견을, 다른 한 명에 대하여는 재범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재판부는 재범가능성 낮다는 피고인에게는 즉시 선고기일을 정하여 집행유예 및 보호관찰을 선고하였고, 재범가능성이 있다는 피고인에 대하여는 가정폭력상담소의 의견서를 분석해본 결과 알코올중독증이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피고인에 대하여 다시 알코올중독증 치료를 명하였다. 그 피고인은 병원에서 몇 개월간의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은 후에야 재판부로부터 집행유예 및 보호관찰을 선고받았다. 피고인들에게 보호관찰을 명하면서 모두 특별준수사항으로 피해자와 함께 월 1회 이상 취미생활을 같이 하고 그 결과를 보호관찰관에게 보고하도록 명하였는데, 그들은 지금 어떤 취미생활을 하고 있을까?

나. 약물중독치료 조건부 보석

  본드흡입으로 소년보호처분을 받은 적이 있고 이종 범죄로 집행유예 중인 피고인이 본드흡입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8월이 선고받고 항소한 사건이 배당되었다.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피고인은 나이가 20대이고, 어머니의 재혼으로 계부와 살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 가출한 뒤 또래의 비행문화에 흡수되었고, 자신을 과도하게 비판하면서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본드 흡입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재판부는 약물중독치료 조건부 보석을 허가하였는데, 어머니가 당초 약속과 달리 피고인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이유로 보증보험증권 제출을 거부하였다. 할 수 없이 다시 보증금을 대폭 낮춘 내용의 보석허가결정을 하고 재판부 예산으로 보증금을 납부하였다. 그 사이에 약물중독치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아 본 결과 국립부곡병원에서 호의적으로 응해 와 피고인이 무료로 약물중독치료를 받게 되었다. 국립부곡병원의 약물중독치료과정은 필로폰 투약자를 대상으로 개설된 것이지만 법원의 요청을 고려하여 피고인에 대하여도 실시해 보겠다고 하였다. 피고인은 국립부곡병원에서 1개월 정도 입원치료를 받은 이후에 2개월 정도 통원치료를 받았고, 국립부곡병원은 단약 및 재활의지가 뚜렷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 동안 가족들도 피고인과 함께 살면서 피고인의 재활을 돕겠다고 나섰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을 선물하였다. 15분만 참으면 마시멜로를 하나 더 받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는 15분을 참았을까?

다. 피해자 개호 및 업무지원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봉사

  교통사고로 피해자에게 장기간의 치료를 요하는 골절상을 가하였지만 책임보험에도 가입하지 아니하고 피해자와 합의도 하지 못하여 1심에서 금고 8월을 선고받고 항소한 사건이 배당되었다. 재판부에서 직권 증인으로 피해자를 불렀다. 그런데 의외로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피고인의 선처를 호소하는 것이 아닌가? 아직 사고 후유증에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도 말이다. 고민 끝에 피고인에게 집행유예와 함께 16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하였다. 사회봉사의 내용은, 피해자가 장애로 자동차정비업소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점과 피고인이 피해회복을 한 바 없다는 고려하여, 피해자의 지시에 따라 그를 개호하거나 그의 업무를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무슨 일을 시켰을까? 피고인은 그 지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라. 성폭력 교정 프로그램 이행 조건부 보석

  16세의 소년이 강제추행치상으죄로 구속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심리결과 소년은 고아원에 거주하는 고등학생이었다. 재판부는 성폭력 교정 프로그램 이행을 조건으로 보석을 허가하였다. 보증보험증권 제출자를 고민하였는데 마침 법정에 나와 있던 보육원장이 흔쾌히 동의하는 바람에 그녀를 보증보험증권 제출자로 하여 보석을 허가하였다. 성폭력상담소에는 공소사실 및 교정 프로그램 이행을 의뢰하게 된 사정 등을 설명하였고, 피고인에게는 성폭력상담소의 의견을 양형에 적극 반영하겠다고 하여 실효성을 높였다. 성폭력 교정 프로그램은 상담과 체험 및 교육을 통하여, 피해자가 성폭력으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피고인의 잘못된 생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절차라고 한다. 피고인이 성폭력의 중대성을 깨닫고 성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여 재범방지를 거둘 수만 있다면, 그를 교도소 대신 성폭력상담소로 보내면서 느꼈던 재판부의 불안이 무의미하게 되지는 아니할 것이다. 지난번에도 고등학생을 상대로 성폭력 교정 프로그램을 이행한 결과 재범방지에 대한 긍정적 의견이 제시되어 집행유예 및 보호관찰을 명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피고인이 성폭력 교정 프로그램을 제대로 이행하여 재범을 하지 않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 그 사이에 피해자의 용서를 얻으면 더 좋겠고......

4. 반성과 후회

  형사부를 하면서 몇 차례 기피신청을 당했던 일, 직권남용으로 고소당한 일이 떠오른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피고인이 절차를 오해한 점에도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 원인은 재판이라는 것이 결국 피고인을 설득하는 절차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피고인의 권리를 재판장의 아량쯤으로 생각한 필자에게 있었다. 반성하고, 후회한다. 그 중 일부 사건에 관하여는 보석을 허가하고 후임재판부에 사건을 넘겼다. 후임재판부에 죄송하고, 사건처리 방향에 관하여 충고해준 ㄱ부장께 감사드린다.

5. 다산 정약용의 충고

  형벌의 목적은 일반예방효과 또는 특별예방효과에 있다고 설명되고 있지만, 어느 것이든 국민의 법준수의지를 높이지 아니한다면 목적달성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 점에서 현재의 사법제도는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 형전육조에서 따온 아래 문구를 인용하면서 부족한 이 글을 마친다.

  ‘형벌로써 백성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최하의 수단이다. 자신을 단속하고 법을 받들어서 장엄하게 임한다면 백성이 법을 범하지 않을 것이니 형벌은 없애 버려도 좋을 것이다.’

  ‘횡포와 난동을 금지하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요, 호족과 강성한 자를 단속하며 귀족이나 근시(近侍)를 꺼리지 않는 것은 목민관으로서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 

                               2007. 1. 6. 창원에서 문형배 올림

(2007. 2. 1.자 법원사람들에 실림 ; 대법원홈페이지/소식/법원사람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