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미디어의 이해를 다시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6. 9. 3. 23:25

1. 마셜 맥루언

마셜 맥루언이 쓴 <미디어의 이해>를 읽었다. 저자는 1911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964년 이 책을 처음 출간하였으며1980년 사망하였다. 토론토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 대중 문화를 강의하면서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발전시켰다.

 

<우리는 보는 대로 된다> <우리는 우리의 도구를 만든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맥루언은 두 가지 기술혁명의 절대적 명령을 검토한다. 그중 하나는 15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활판인쇄술의 발명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후반 이후에 나타난 전기의 새로운 이용방식들 즉 전신, 전화, 텔레비전, 컴퓨터 등이다.


이 책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2. 미디어의 이해

'미디어는 메시지다'를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어렴풋이 짐직할 수 있다.


모든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대응, 즉 <중요한 것은 미디어들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이다> 라는 식의 대응은 기술에 대한 백치의 감각 마비 상태이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내용>이란 강도가 정신을 지키는 개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맛있는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효과가 강렬해지는 것은 또다른 미디어가 <내용>으로 주어진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내용은 소설이나 연극 혹은 오페리이다. 영화라는 형식의 효과는 그것의 프로그램 내용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전기시대의 근본적인 변화는 <의미>보다는 <효과>에 더 관심을 더 두게 된다. 왜냐하면, 효과는  전체적인 생활을 포함하는 것이지 정보 이동이라는 단일 수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디어를 뜨거운 미디어와 차가운 미디어로 분류한다. 전자는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다. 여기서 고밀도란 데이터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한다. 후자는 저밀도의 미디어이다. 따라서 이용자의 참여도가 높다. 사진,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이고, 만화, 텔레비전은 차가운 미디어다.


매카시 상원의원이 라디오 출연을 그만두고 텔레비전에 출연하였으나 그 출연이 극히 짧은 시일밖에 계속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며 맥루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즉, 텔레비전은 차가운 미디어이다. 텔레비전은 뜨거운 인물, 뜨거운 사람, 그리고 뜨거운 인쇄 미디어에서 비롯된 인물을 거부한다.


라디오로 케네디와 닉슨의 토론을 들은 사람은 닉슨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라는 차가운 미디어로 날카롭고 높은 선명도의 이미지와 행동을 내보낸 것은 닉슨의 패착이었다고 맥루언은 본다. 


라디오에 대하여 맥루언은,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힘을 널리 지니고 있다고 본다. 숙제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젊은이들이나 군중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라디오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예로 든다. 또한 라디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개인 대 개인으로 상대할 때처럼 친근하게 다가간다고 본다. 


텔레비전은, 만족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보다는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적합하다고 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형식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고 한다. 겉모습에서 역할과 지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람은 텔레비전에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뜨거운 영화 미디어는 어떤 타입인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는 인물을 필요로 한다.


다음과 같은 맥루언의 주장에는 예지가 돋보인다.


정보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정치는 대표를 선출하여 결정권을 위탁하는 경향에서 벗어났다. 전 사회공동체가 의사 결정이라는 중추적 행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다. 정보의 속도가 느려지면 대리인이나 대표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광고는 뉴스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광고는 언제나 <좋은> 뉴스라는 점이다. 균형을 맞춰 효과를 내고 좋은 뉴스를 팔기 위해서는 많은 나쁜 뉴스들이 필요하다. 게다가 신문은 뜨거운 미디어이다. 강도를 높이고 독자의 참여를 높이려면 나쁜 소식이있어야만 한다.


전기적 구조에서는 주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지구상의 시간과 공간 내에서는 말이다. 따라서 중심과 중심 사이의, 동등한 힘 사이의 대화만이 있을 뿐이다.


발생학적으로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답을 가지고 있으며, 단지 그것을 밝히는 방법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에디슨은 이렇듯 실제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3. 맥루언에 대한 오해

왜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이고 텔레비전은 차가운 미디어인지 저자의 설명은 없다. 맥루언의 직관에 의존하는 주장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맥루언에 대한 오해때문일 것이다.


                    2016. 9. 3.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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