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난중일기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3. 6. 16. 20:20

1. 읽기 까지

내가 다닌 대아고등학교는 매년 4월 28일 충무공 이순신의 탄생에 맞춰 학교가 있는 진주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전을 거둔 사천까지 행군을 하였다. 내가 태어난 경남 하동군 북천면 모성마을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하러 서울에서 출발하여 도원수 권율장군의 진영이 있는 합천으로 가는 여정에 포함되어 있다. 난중일기 1597년 6월 1일에 '일찍 출발하여 하동 땅 청수역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문장이 나오는데 이날 고향 동네를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숨막히게 절제된 문장에 놀랐는데 난중일기를 읽다보니 김훈 선생이 이순신 장군의 문체를 본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상품권을 받은 게 있어 동네서점에 들렀다가 <난중일기>를 보고 주저 없이 골랐다.

 

2. 읽으면서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8일까지 기록되어 있고, 중간에 빠져 있는 부분도 제법 있다. 어떤 날은 '맑다'로 끝날 만큼 짧고, 명량대전을 기록한 1597년 9월 16일은 제법 길다. 

 

난중일기 중에 두드러진 부분은 어머니의 안위에 관한 걱정이다. 어머니는 충남 아산에서 전남 여수시로 거처를 옮기는데 아마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의 아들 면도 적과 싸우다가 죽는데, 아버지는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초자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고 기록한다.

 

난중일기 곳곳에서 이순신 장군의 건강 상태가 기록되어 있는데 수시로 '밤에 땀을 많이 흘렸다', '앉았다 누웠다 '라고 기록한 것으 보아 건강상태는 나빴던 것 같다. 그리고 원균을 비롯한 장수들의 잘못된 형태에 대한 지적이 더러 나온다. 가령 원균의 경우 '싸우는 곳마다 화살이나 탄환에 맞은 왜인들을 찾아내어 머리 베는 일을 맡아 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라의 제삿날이나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인 제삿날에 공무를 보지 않는 것도 눈에 띄었다. '분하고 분하였다' 같이 되풀이함으로써 의미를 강조하는 것도 눈에 띄였다.

 

난중일기의 문장 몇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적선이 있는 줄을 알고 이순신은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하였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적들은 두려워서 나와 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밤 바다는 달빛이 차게 비치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았다. 다시 식은 땀을 흘렸다.

 

내 몸도 피곤하고 말도 고될 것 같아서 함평에 머물러 잤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어찌 빨리 죽지 않는가?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3. 읽고 난 후

1597년 1월 27일 이순신 장군은 구속되고 약 한 달만에 특사되어 백의종군하다가 1597년 7월 22일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된다. 도대체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한 장군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짓을 한 것일까? 당파싸움으로 영웅을 내칠 만큼 조선이 여유가 있었는가? 선조 임금은 이순신 장군이 죄가 없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렇다면 선조는 무능하다. 이순신 장군이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구속하였다면 그는 군주의 자격이 없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는 전쟁을 치를수록 선조가 백성의 신임을 잃어가고 이순신 장군이 백성의 신임을 얻어 가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이순신 장군은 왜 전쟁 중에 일기를 썼을까? 우선 (1) 업무일지 성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중앙에서 내려온 명령, 관할 하에 있는 관리들의 방문 내용, 군율 위반으로 부하를 처벌하는 내용, 군사훈련 내용, 무기를 마련하는 내용, 날씨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2) 일기 성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나라의 장래에 대한 불안, 조정의 잘못된 형태에 대한 울분, 건강 상태에 대한 걱정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3) 사초성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전쟁 중에 죽으리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고, 전쟁에 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세가 자신의 처신에 대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비밀교지에 대하여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라고 기록한 데서 추측해본다. 해군은 조선의 전부인데 승리에 대한 확신없이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느냐는 전략적 고려를 드러냈다고 본다.

 

1592년에서 1598년까지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얻은 교훈을 2013년 대한민국은 기억하고 있는 걸까?

 

    2013. 6. 16. 부산에서 자작나무 

 

 

 

 

 

 

 

 

'독서일기(추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0) 2013.09.01
통치론을 읽고  (0) 2013.08.11
마담 보바리를 읽고  (0) 2012.12.31
키케로의 의무론을 읽고  (0) 2012.12.19
종의 기원을 읽고  (0) 2012.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