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노동의 배신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2. 7. 8. 12:57

1. 개괄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을 읽었다. 저자는 <긍정의 배신>이라는 베스트셀러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사회운동가다. 이 책은 저자가 2000년 전후 웨이트리스, 청소부, 판매원과 같은 저임금 노동자의 삶을 체험하고 이를 수기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2001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어 150만 부 이상 팔렸고 빈곤 문제를 조명한 현대의 고전이 되었다.

 

2. 발췌

가장 확실한 차이점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생활하고 거의 평생 살아가는 그 세계를 나는 잠시 방문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의 몇몇 명제가 그렇듯이, 빈곤 속의 삶도 시작 조건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했다.

 

제리스에는 휴게실이 없었다. 휴식 시간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소변 볼 때를 빼놓고는 6~8 시간 동안 계속 서 있어야 했다.

 

우리는 규칙상 고객의 집에 있는 동안에는 음료수나 음식을 입 안에 넣을 수 없었다.....청소부로 일할 때는 소모된 수분을 보충하지도, 쉬지도 못한 채로 땀을 흘렸다.

 

우리의 세계는 통증이 지배했다. 통증을 참는 방법으로는 엑세드린이나 애드빌 같은 진통제를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한두 명은 술로 달랬다.

 

중상층의 친구들이 모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그래서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집안일을 도와 줄 사람을 고용함에도 내가 청소부를 부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도무지 다른 사람과 그런 인간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였다......청소부가 되어 처음으로 똥 묻은 변기와 대면했을 때 나는 누군가와 원치 않는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직업군으로서 청소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집단이고 우리가 보이게 되는 경우는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뿐이다.

 

경비원, 청소부, 단순노동자, 성인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사람들, 이들은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 사회의 불가촉천민들이었다.

 

어떤 일을 해 보지도 않고 단순노동이니 쉬울 거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내가 모텔에서 살면서 끼니를 거의 모두 패스트푸드로 때운다는 얘기를 듣고 안쓰럽게 생각한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그러나 당황하기보다는 기업의 인색함이 지배하는 곳에서 소리 없이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친철한 마음씨를 발견하고 감동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내가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세상에 아무리 보잘것없는 직업이라도 아무 기술도 필요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번 저임금 체험을 통해 인간의 미세 체계는 맨 밑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든 반면 그 필요성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린 가족이 없는 홀몸에, 건강하고, 차까지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땀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도 먹고살기가 아주 힘겨울 정도로 빠듯하다면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빈민들이 실제 경험하는 주택난과 공식적으로 정의되는 빈곤이 불일치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도 한 가구의 구성원 수를 따져서 최소한의 식비를 산정하고 그 액수에 3을 곱하는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빈곤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오르지 않는 가장 명백한 이유는 고용주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임금 상승을 막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내가 허스사이드에서 제리스로 옮겼던 것처럼 급여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지 않는 걸까? 그 해답의 일부는 인간은 구슬과 다르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구슬과 달리 거취를 결정할 때 적지 않는 마찰을 경험하게 된다.

 

저소득 노동자들이 경제적 인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경제학 법칙이 제대로 적용되려면 우선 선택을 하는 주체인 개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선택의 범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그러나 저임금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조언을 구할 곳이 없다.

 

노동자가 행동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것 중 한 가지는 직원을 동료나 팀원이라고 지칭하며 조직 속으로 흡수하는 경영진의 권력이다.

 

자본주의 민주 국가에 속한 자유로운 노동자인 저임금 노동자들이 늘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전혀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무가치한 사람 취급을 오래 받다 보면 자기 같은 사람은 임금은 그만큼만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회 전반을 봤을 때도 이와 비슷한 악순환을 겪고 있는 듯하다. 뭉뚱그려 '사회적 임금'이라고 통칭하는 빈민을 위한 공공 서비스에 쓰이는 예산은 깎이고 감옥과 치안에 들어가는 투자는 계속 늘어 간다.

 

우리는 수백만 저임금 노동자들이 겪는 빈곤을 비상사태로 보아야 한다.

 

고도로 양극화되고 불평등한 우리 사회의 시각적 특성 때문에 빈민들은 경제적 우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사회적 동의에 의해 워킹 푸어(working poor)라고 불리는 그들은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남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남의 집을 쾌적하고 광이 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은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산다. 그들이 궁핍을 견딤으로써 인플레이션이 떨어지고 주가가 올라간다. 워킹 푸어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모두를 위해 익명의 기증자, 이름 없는 기부자가 되는 것이다.

 

불황의 그늘 속에 있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불행한 삶을 조사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미국 사회에서 이미 가난이 너무나 범죄시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세계 제1이라는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수감률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교도소에 갇혀 있는 미국인은 230만 명으로 공공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 수와 같다.

 

그렇다면 미국의 그 많은 노동 인구가 맞다뜨린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더 높은 최저 임금, 보편적인 의료 혜택, 집세가 적당한 집, 좋은 학교, 믿을 만한 대중 교통, 그 외에 선진국 중에서 미국만이 유일하게 추진하지 않는 여러 공공사업들.

 

3. 소감

나는 1986년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한 달 반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구로공단에 있는 전자부품회사에서 하루에 나사 1500개를 조이고, 그 대가로 하루에 3340원을 받았다. 그게 26년 전 일이다.

현재 양극화가 심각하다고 한다. 양극화를 해소하는 방법은 양극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누가 그 다리를 놓아야 하는가? 아니 놓을 수 있는가?

 

             2012. 7. 8.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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