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피로사회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2. 4. 21. 14:49

1. 개괄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었다. 저자는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일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다고 한다. 이 책의 핵심적 테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핌, 타자에 대한 거부 등)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화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2. 발췌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보드리야르)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존재를 의지로 대체한 니체조차 인간에게 모든 관조적 요소가 제거된다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난다.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 다른 것이다.....무언가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나의 책 <피로사회>도 치유적 피로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치유적 피로는 자아가 스스로에게 곤욕을 당하는 자아 피로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자아 피로는 자아의 잉여와 반복에서 비롯되는 피로다. 하지만 치유적 피로는 그러한 피로 속에서 자아는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한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한다.

 

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강력한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슬픔은 대상과의 강력한 리비도적 유대관계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그 점에서 우울증과 구별된다. 반면 우울증은 대상이 없고 따라서 지향점도 없다.

 

에랭베르에 따르면 갈등은 건설적 기능을 수행한다. 개인적이 정체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 또한 "갈등을 통해서 응집되는" 요소들로 구성된다. 정치에서나 사적인 삶에서나 갈등은 민주적 문화의 규범적 핵을 이룬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3. 소감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공동체의 가치를 공유하고, 구성원 간의 유대를 회복하며, 일상의 삶에서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서울이 아닌 지방에 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0년 직장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소박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끝임없이 추구하되 경쟁에서 한발 물러난 때문이 아니었을까?

 

                                2012. 4. 21.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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