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열린 사회외 그 적들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1. 11. 26. 08:56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1>을 읽었다. 저자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제시한 반증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즉 한 이론의 과학적 자격의 기준은 그 이론의 반증가능성, 반박가능성, 테스트가능성이다. 저자는 열린사회의 적으로 역사주의를 꼽는다. 특히 플라톤과 마르크스를 열린사회의 적으로 비판한다. 이 책에서 인류의 역사는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의 오랜 투쟁의 과정이라고 본다.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이 전체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줄기찬 투쟁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역사주의의 핵심적인 원리란, 역사는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며, 우리가 이 법칙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완전한 국가의 모형이나 원형을 먼 옛날인 역사의 여명기에 존재했던 황금시기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세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패해 간다면,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보다 완전한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플라톤이 주장하는 바는 변화는 사악하고, 정지는 신성하다는 것이다.

 

모든 도덕적 결단은 이런 식으로 이런저런 사실, 특히 사회생활의 어떤 사실에 관계하며, 사회생활의 모든 (변경 가능한) 사실들은 무수히 다른 결단들을 유발할 수 있다. 어느 것이든 결단은 이런 사실이나 이런 사실의 진술로부터는 결코 도출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비판적 이원론은 결단이나 규범을 사실에 귀속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비판적 이원론은 사실과 결단의 이원론이라고 기술될 수 있다.

 

나는 누가 최초의 윤리적 입안자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제시된 어떤 도덕적 법칙을 채택하든지 거부하든지 그 책임을 질 자는 우리들이며, 우리들뿐이라는 것을 주장할 따름이다.

 

플라톤은 상실된 부족생활의 공동체를 열망하고 있었다. 사회적 혁명의 와중에서 변화의 생활이란 그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플라톤이 선과 정의 및 언급된 다른 이념들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을 고려해 보면, 플라톤의 정치적 요구는 순전히 전체주의적이고 반인도주의적이라는 나의 이론이 옹호될 것이다.

 

자유주의와 국가 간섭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종류의 자유도 국가가 보장해주지 않으면 분명 불가능하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치를 도덕화하는 것이지, 도덕을 정치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물론 최선의 통치자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에 있어서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한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적 원칙의 수용은 (우리가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한) 민주주의하에서 악정을 받아들이는 편이 아무리 현명하고 자비로운 참주라 해도 그에게 예속되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하는 확신을 암시하고 있다.

 

제도는 요새와 같다. 요새는 잘 설계되어야 하고, 그리고 사람에 의해 잘 지켜져야 한다.

 

민주적 제도는 제도 자체를 개선할 수는 없다. 제도를 개선하려는 문제는 항상 제도에 관계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제도의 개선을 원한다면, 어떤 제도를 개선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액턴 경의 말처럼, 모든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왕이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있음 직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권력의 소유는 이성의 자유로운 판단을 반드시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나 왕과 같이 자기 스스로 지배하는 사람들은 철학자를 억압해서는 안 되며, 그들에게 공개적인 발표의 권리를 반드시 주어야만 한다(칸트)

 

항상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낭만주의는,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선한 의도가 있다 해도, 단지 하나의 지옥을 만들 뿐이다.

 

점진적 공학자는 최대의 궁극적 선을 추구하고 또 그 선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사회 최대의 악과 가장 긴급한 악을 찾고 그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방법을 적용할 것이다

 

계란을 깨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레닌)

 

우리는 마술적 사회나 부족사회 혹은 집단적 사회는 닫힌사회라 부르며, 개개인이 개인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는 열린사회라 부르고자 한다.

 

닫힌사회에서 열린사회로의 이행이란 분명히 인류가 겪은 가장 심원한 혁명 중의 하나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수 있다 해도, 우리 모두는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

 

소크라테스는 머물렀고 자신의 이유를 진술했던 것이다. 국가를 위해 죽겠다는 것보다 더 낫게 그의 충성심을 증명할 길은 없는 것이다.

 

감정을 파괴하려는 헛된 노력에 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감정을 이용하라.

 

정직함이 최선의 정책이다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정직함이 정책보다 낫다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칸트)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열린사회인가? 닫힌사회인가?

 

                      2011. 11. 25. 진주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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