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경제경영)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09. 8. 8. 10:01

칼 폴라니의 '거대환 전환'을 읽었다. 한겨레21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홍기빈님이 칼 폴라니를 소개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일어 사서 읽었는데, 어려워서 이해가 잘 되지 아니 하였다. 처음 읽는 분은 맨 끝에 있는 옮긴이 해제를 읽고, 맨 처음에 있는 다른 사람의 발문, 해제, 서문을 읽은 다음 본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옮긴이 해제에 따르면, 칼 폴라니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평생을 걸쳐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인다. 이론적 정합성을 가진 추상적 경제 이론의 구성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 속에서 자유의 실현 가능성을 알아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능적 민주주의를 꺼내든다. 즉, 생산자와 소비자가 각각의 조합을 만들고 여기에 생활 협동조합, 지방 자치체, 심지어 정당 등 각각의 기능에 따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모든 사회적 단위에서 경제적 의사 결정의 의견을 개진하여 집단적 토론을 벌이는 방식으로 사회주의적 회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발견한 시장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단순한 경제적 착취가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분노한 것은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시장에서의 상품이라는 허울을 씌워 인간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욕구를 처참하게 부정해버리는 시장 자본주의의 더욱 포괄적인 인간 파괴의 모습이었다.

인간 존재의 핵심은 국가도 기계도 시장도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실제로 관계를 맺는 사회이다.

폴라니의 대답은 다시 '자유'이다.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영혼은 분리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본연의 모습이다. 이것을 여러 기능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 산업사회라는 '복합사회'와 양립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사회라는 실체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주의가 인류의 나아갈 길이다.

 

첫 부분에 붙어 있는 프레드 블록의 해제에 따르면,폴라니의 비전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정부의 역활을 확장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폴라니의 대안은 전 지구 모든 나라의 보통 사람들이 경제를 민주 정치에 복속시키고 지구 경제를 국제적 협력의 기초 위에서 재건하는 노력에 함께 매진하는 것이다.

 

루이 뒤몽의 서문 및 칼 폴라니의 본문 중에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변화는 그것이 효과적이고 용인될 수 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점진적이어야 하며 너무 빠르면 상처를 남긴다(폴라니)

 

19세기 체제가 나오게 된 원천이자 모태였던 것은 자기조정 시장이었다.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는 해체되었고 1930년에 들어서면 문명 전체가 전환을 겪게 된바, 이 둘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고리는 바로 국제 금본위제의 붕괴였다.

 

전국 규모의 자유로운 노동 시장이 생겨날 경우, 지역에 따라 임금 수준은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으니 일자리를 찾는 이들 또한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이 마을 저 마을로 우르르 몰려다닐 것이다. 이는 그 동안 정주법으로 인구 이동이 고정된 채 평안하게 유지되었던 각 농촌 마을의 환경에 상당한 불안정성을 가져다줄 것이다.....스피넘랜드 법(임금이 생계비에 미치지 못할 때 그 부족분을 보조하기 위한 수당이 보편적으로 시행되며 여기에 가족들을 위한 수당이 덧붙여진다)이란 이런 상황에 대처하여 바로 이러한 시골 지주들이 자기 마을에서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책이다.

 

인간 만사를 그야말로 제 갈 길 가도록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결코 자유시장이란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유무역과 직결된 주도적 산업이었던 면화 제조업만 하더라도, 보호관세, 수출장려금, 간접적인 임금 보조금 따위의 도움을 빌려 나타난 것이다.

 

시장 유토피아를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는 사회 실재의 현실이라는 것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사회 실재의 현실이야말로 자유주의를 한편으로 하고 파시즘 및 사회주의를 다른 편으로 갈라놓는 구분선이다. 그리고 파시즘과 사회주의 사이의 차이점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문제이다. 심지어 파시즘과 사회주의 양쪽이 동일한 경제적 논리를 구사하는 지점에서마저도 각각이 체현하고 있는 원리는 다른 정도가 아니라 실로 상극이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둘이 갈라지는 궁극적인 지점은 다시 자유의 문제이다.

 

사회 실재의 현실을 인정하게 된 후 여기에 파시스트들이 내놓았던 대답은 자유라는 공준을 폐기하자는 것이다.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다.

 

사회 실재의 현실을 불평 없이 묵묵하게 받아들인 이상,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종류의 불의와 非자유라면 모조리 제거해내고 말겠다는 그 아무도 꺽을 수 없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인간이 그러한 스스로의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이다. 이것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책이다. 우선 낯선 내용이 많고, 저자의 지식이 경제학, 인류학, 사회학, 역사학, 법학을 넘나들어 온전하게 이해하기 매우 힘들었다. 다만, 신자유주의가 마치 마법이나 되는 것처럼 외치던 사람들에게, 현재 진행중인 국제 금융위기의 현실과 함께 칼 폴라니의 외침이 큰 충격이 될 것 같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구 소련에서 실시한 계획경제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장과 국가 사이에 사회라는 실재를 발견하고, 사회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속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서 독자성과 신규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좁은 소견으로는 민주주의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해보였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2009. 8. 8.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