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09. 6. 21. 13:44

김두식 교수의 '불멸의 신성가족'을 읽었다. 저자는 사법시험 33회에 합격하여 검사로 근무하다가 현재는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다. 그가 쓴 '헌법의 풍경'을 감동적으로 읽은 적이 있어 단번에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이 책은 희망제작소의 '우리시대 희망찾기'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저자가 23명의 법조계 안팎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대한민국 법조계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한 내용이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타인의 삶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체험이나 행동의 범주를 넘어서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마루야마 겐지)

 

재판받은 사람들이 결과 못지않게, 그 '과정의 공정성'이나 '충분한 의사소통'을 중요시한다면, 재판하는 사람들은 주로 '결과의 공정성'과 '과정의 효율성'을 이야기 합니다. 어디에서 사법불신이 생기는지 짐작할 수 있는 좋은 단서이지요.

 

검사든 판사든 누구라도, 먼저 들은 이야기에 따라 사건의 틀을 짜고 결론을 쉽게 유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판검사들이 사람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고 설명해주기만 해도 절반으로 줄어들리라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죄인처럼 떨리는 상태에서 용기를 내어 겨우 한마디씩 하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거나 사안과 관계없다는 판사의 판단만으로 말을 잘라버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법불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법조계가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골프, 술, 회식 등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만남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성가족은 자신의 힘으로 창조한 것이며, 사악한 사회에서 자유롭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사회에서 해방시킨 존재입니다......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바로 이 신성가족을 떠올립니다.

 

미국의 보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중국, 프랑스, 이딸리아 등과 함께 우리나라를 가족주의가 지배하는 대표적인 '저신뢰사회'로 규정했습니다. 가족주의사회에서는 혈연관계로 엮이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할 만한 토대가 없기 때문에 자발적인 결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고비용으로 연결되게 마련입니다.

 

판검사들이 용돈을 받거나 청탁을 받으며 전관 변호사의 영향을 받아온 우리 법조의 잘못된 현실은 결국 한가지 원인으로 귀착됩니다. 정종은 검사가 말했듯이, 모든 판검사가 결국은 변호사를 하게 되어 있는 우리 법조계의 구조 말입니다.

 

사법불신의 뿌리를 요약해야 한다면 저는 '의사소통의 부재'와 '원만함이라는 신성가족 이데올로기' 두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사법씨스템에서 의사소통은 원칙적으로 '법정'에서 '말'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판검사들이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의 확보입니다.

 

저는 판검사의 대폭 증원이 한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그걸 위해서는 판검사의 증원뿐만 아니라 경험 많은 판검사를 확보할 방안도 마련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 면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돈보다 관계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만함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켜내는 것은 언제나 기득권층의 이익과 기존 질서입니다.

 

당장 신성가족의 해체가 어렵다면, 시민들이 먼저 그 장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그 시도가 '판검사에게 말걸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였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점에 대하여 저자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많은 법조인들이 이 책을 읽어봄으로써 지긋지긋한 사법불신의 벽을 함께 극복하였으면 한다.

 

다만, 지난 날 촌지를 주고 받던 관행이 사라진 지금 이 문제가 지나치게 부각된 점, 공보판사는 단독판사 중에서 법관경력 및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 관례인데도 상당수가 법원행정처 출신이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선발을 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 점 등등 몇가지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런 문제로 인하여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약해지는것은 아니다.

 

제도 개선과 관련하여 저자의 주장에 몇가지를 덧붙이자면 소송구조제도의 활성화이다. 당사자가 아무리 많이 알고 있고 아무리 절박해도 그런 점만으로 소송에서 이길 수는 없다. 억울한 사정을 효과적으로 말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요령껏 수집하는 데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판사를 아무리 충원해도, 판사가 아무리 성의를 갖고 당사자의 말을 들으려고 해도 당사자주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돈 없는 사람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소송구조제도를 더 활성화필요가 있다. 당연히 예산의 증가가 필요하다.  소송구조의 내용도 사건이 터진 후 변호사를 선임해주는 것을 넘어서서, 사건이 터지기 전에 시민들이 꼭 알아야 할 법률상식을 홍보하고, 교육하고, 상담하는 것까지로 넓혀야 한다고 본다.

 

또 하나는 법정의 권위를 함부로 훼손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분쟁해결을 법원이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법정의 권위가 존중되지 아니하면 법원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이는 소수자가 기댈 마지막 보루가 법원이라는 점을 떠올릴 때 더욱 절실하다.

 

물론 법원이 잘못되었다면 이를 지적하는 것이 보장되어야 하고 법원도 그 지적에 귀기울여야 겠지만, 합리적 이유없이 법원의 판결을 비난하거나 판사를 헐뜯는 풍토는 고쳐져야 한다. 나는 당사자로부터 재판 진행과 관련하여 2번 고소를 당한 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고소한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이것은 저자가 주장하는 '판검사에게 말걸기'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시민운동이나 언론에서도 법원의 판결을 비판하는 데는 이런 내재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유의하였으면 한다. 시민운동이나 언론이 존경하는 판사도, 존경하지 않는 판사도 모두 사법의 일부를 이루고 있고, 사법에는 그 기능에 상응한 존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 없는 저자가 용기를 내어 법조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 점에 박수를 보낸다.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2009. 6. 21.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