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암송

나희덕의 '그의 사진'

자작나무의숲 2009. 6. 2. 15:32

                        그의 사진 -나희덕-

 

그가 쏟아놓고 간 물이

마르기 위해서는 얼마간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 속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웃고 있지만 실은

남아 있는 물기를 거두어들이는 중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그림자처럼

그의 사진은 그보다 집을 잘 지킨다

사진의 배웅을 받으며 나갔다

사진을 보며 거실에 들어서는 날들,

그 고요 속에서

겨울 열매처럼 뒤늦게 익어가는 것도 있으니

평화는 그의 사진과 함께 늙어간다

모든 파열음을 흡수한 사각의 진공 속에서

그는 아직 살고 있는가

마른 잠자리처럼 액자 속에 채집된

어느 여름날의 바닷가, 그러나

파도소리 같은 건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사진 속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듯 웃고 있지만

액자 위에는 어느새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다

볕이 환하게 드는 아침에도 미움도

연민도 아닌 손으로 사진을 닦기도 한다

먼지가 덮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걸레가 닦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친구로부터 받은 나희덕의 '야생사과'라는 시집에서 '그의 사진'이라는 시를 발견하였다. 읽는 순간 최근에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랐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감정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시간이 지나면 그런 감정도 옅어지고 종국에는 사라질지도 모르지.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의 사진? 아님 물기의 자국? 그래서 손으로 사진을 닦는 것일까? 울음을 통해 물기를 유지해야 하는 것일까? 친구는 하필 이 시집을 내게 보낸 것일까? 친구는 시집 여백에 "어려운 시기를 묵묵히 견디며 잘 걸어가는 친구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며" 라고 적었다.

2009. 6. 2. 부산에서 자작나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