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독립되어 있지 아니 하면 사법이 아닙니다.

자작나무의숲 2009. 7. 11. 20:00

독립되어 있지 아니 하면 사법이 아닙니다.

1. 헌법

  최근 들어 헌법전을 뒤져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의 독립’이라는 제목을 달고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헌법을 다 뒤져봐도 역할을 정의하면서 ‘독립하여’가 규정되어 있는 헌법기관은 법관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왜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유독 법관에게만 독립을 강조했을까 궁금했습니다. 몇 달 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연구하고 사색해보았습니다. 

 

2. 사법의 독립

  우선 몽테스키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재판권이 입법권과 집행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을 때에도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동일한 인간 또는 귀족이나 시민 중 주요한 사람의 동일 단체가 세 가지 권력을 행사한다면 모든 것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는 권력을 분산해야 국민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보았고, 이런 점에서 사법권도 다른 권력과 분리할 필요를 인정하였습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도 중립적인 법원의 존재의의를 인정하였다는 점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1254년경에 설립된 파리의 고등법원을 예로 들며 중립적인 법원의 존재가 왕의 자유 및 안전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제도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중립적인 법원의 존재는 왕의 자유 및 안전의 기초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 이후 나온 많은 이들의 책을 검토한 결과, 재판의 독립은 법치주의의 핵심이고 법치주의는 자유민주주의자의 신념이며, 자유민주주의자가 사법의 독립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본 바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May Day와 대항하는 의미로 법의 날을 5월 1일 같은 날로 정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최근 들어 사법의 독립을 사법행정권과 동렬이거나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는 사법행정권 아래에 존재할 수도 있는 가치쯤으로 여기는 주장을 보고 있으면 혼란스럽습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타개하려고 뉴딜정책을 펼칠 때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이 얼마나 많은 제지를 하였는지를 보면 제 혼란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다양성 보장

  그러나 저는 사법의 독립을 위와 같이 바라보는 데는 뭔가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차에 생태계는 생물의 다양성이 보존될 때 안전하고 단순한 생태계는 파괴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적자생존의 근거로 자주 등장하는 다윈의 진화론도 그 본질은 가장 우수한 종을 추구하는 경쟁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생명체의 공통 기원에 중점을 두면서 현 생태계의 다양성을 찬미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책(멜빈 브래그의 세상을 바꾼 12권의 책)도 읽게 되었습니다. 21세기의 가치로 생태주의를 꼽는 데 이견이 없을 듯한데, 생태주의 시대를 특정 짓는 가장 소중한 가치는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국제사회는 생물다양성보존협약까지 체결해가며 생물의 다양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토크빌조차도 ‘민주주의의 특징적인 감정들 가운데 한 가지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성향’이라고 서술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법에서는 어떻게 다양성이 보장될까요? 그 해답역시 ‘독립’이라는 것입니다. 독립되어 있지 아니하고 다수자가 지배할 경우 다양성이 보장되지 못함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시국사건에서 일사불란한 처리를 주문했던 유신시대, 제5공화국시대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여기서 다수자는 권력의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고, 여론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권력은 외부에 있을 수도 있고, 내부에 있을 수도 있겠지요.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올 것 같군요. 그럼 들쭉날쭉한 판결이 나와도 된다는 말이냐. 그럼 곤란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헌법은 그에 대한 해답을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헌법 제101조에서 정한 심급제도가 그것이지요. 토론을 거쳐 보편타당한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요체이고 민주주의의 사법 역시 예외가 아니겠지요. 토론과정에서 정합성을 잃은 것은 걸러지고 다수의견은 더욱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겠지요. 여기서 걸러진다는 말의 뜻을 폐기물이 되었다는 뜻으로 새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대법원의 판례변천과정을 보면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되고 다수의견이 소수의견이 되는 예를 수없이 보아 온 우리로서는, 걸러진 소수의견은 언젠가 재활용될 수도 있는 ‘소중한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레옥잠 같은 흔한 풀도 상수원의 부영양화를 막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기능을 한다는 점이 밝혀지듯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도 하찮게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양성이 보장되지 아니할 때는 토론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더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4. 마무리

  이제 깊이도 없는 제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최근에 파스칼의 팡세를 만났습니다. ‘다양성 없는 통일은 외부의 사람들에게 무익하고, 통일 없는 다양성은 우리에게 파멸을 가져온다. 전자는 외부에 해롭고, 후자는 내부에 해롭다.’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다양성은 외부의 사람들에게도, 내부의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다양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갖춘 균형적 상태 즉 多安性을 추구하자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다소 거칠게 제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독립되어 있지 아니하면 사법이 아니다’. ‘사법의 독립과 사법행정권은 비교형량을 거론할 수 있을 정도로 동등한 가치가 아니다. 만일 사법의 독립과 사법행정권이 교차한다면 마땅히 사법행정권이 사법의 독립에게 길을 양보해야 한다’

   내부자에 의한 재판권 침해를 용인한다면 외부자에 의한 재판권 침해를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족한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2009. 5. 11. 법원 게시판에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