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플루타크 영웅전(하)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07. 8. 19. 21:52

플루타크 영웅전(하)를 읽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대하여 역자인 박광순님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플루타크 영웅전의 밑바닥에 흐르는 근본적인 힘은 저자의 인격이라고 볼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열렬한 도덕가였다. 그는 장엄한 윤리관과 진지한 정의관을 지니고 있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를 석권한 것은 그가 확고한 도덕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고, 페리클레스가 40여 년에 걸쳐 아테네를 통치한 것도 그가 고결한 미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영웅은 최고 도덕의 표현이었다. 또한 정의를 위해서는 운명과 싸우는 것마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참된 영웅이었던 것이다.

 

하권에는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같이 익히 알려진 영웅이 포함되어 있지만, 눈에 띄는 인물은 小카토다. 카토는 호민관으로 선출된 뒤 집정관 선거 때 후보자가 돈을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것을 보고는 그 부패상을 엄히 꾸짖고, 앞으로 돈을 많이 쓰는 후보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히 다스리겠다고 밝혔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만나, 갈리아를 계속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얻는 대신 그 두사람이 집정관으로 선출되도록 도와 주는 한편, 그들 역시 넓은 영지를 관할하고 군대를 거느릴 수 있게 해주기로 했다. 이것은 로마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으로 명백한 모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저지하려고 시민들에게 호소하던 카토는, 한 번은 직접 폼페이우스를 찾아가 말했다. "폼페이우스, 당신은 지금 카이사르를 어깨 위에 올려놓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얼마 뒤에는 그 짐이 너무 무거워 허덕이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내려놓을 수도, 그냥 지고 있을 수도 없어서 공화정 위에 쓰러지고 말 것이오. 그때에야 당신은 내 충고가 생각날 것이오. 내 충고는 정의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이로운 것이오"

 

카토는 법무관으로 선출된 후 뇌물을 주는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 자신의 감독하에 각 후보자들이 12만 5천 드라크마를 내놓은 뒤 공정하고 정직하게 선거 운동을 하기로 약속하게 했다.

 

카이사르가 로마를 진격해오자 카토는 로마를 떠난 이후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이기든 지든 조국이 겪고 있는 재난을 생각하면서 비탄에 싸여 지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전군을 이끌고 유티카 성을 향해 진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들에게는 세상이 어지러워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기가 불가능하며, 세상을 좇으면 이름을 더럽히게 되니 정치에 관여하지말라고 당부했다. 저녁이 되자 여러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술을 마시면서 철학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자정쯤 되자 자리에 눕고는 칼을 뽑아 가슴을 찔러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 외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대목은 다음과 같다.

 

아테네인은 누구든 능력이 필요하면 서슴지 않고 이용하다가도 그의 권력이 커지면 그것을 시기하고 기회가 오면 퇴출시켜 버렸다.

 

아게실라우스는 한쪽 다리가 다른 한쪽 다리보다 약간 짧았지만, 이런 신체적 결함은 그의 젊은 패기에 가려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스파르타를 파멸로부터 구한 것은 이런 국난에 처해 야심과 공명심을 버리고 갖은 모욕을 다 참으며 적의 도전에 응하지 않은 아게실라우스 덕분이라는 데는 모든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지혜와 용기로도 조국을 예전처럼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클레오메네스는 이에 고무되어 옛날의 어느 왕이 한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스파르타군은 적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지 않고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물을 필요가 없소"

 

데모 스테네스는 도덕을 실천하는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권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키케로는 당시 로마에서 절대적인 권세를 누리고 있었는데, 그가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또 그들로부터 질시를 받았던 것은 그에게 무슨 잘못이나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칭찬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폼페이우스가 제왕이 될까 두려워 일치 단결해 반대하기로 했지만 막상 투표일이 되자 민중이 두려워 아무도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못했다.

 

아시아에 원정을 나가 있던 아게실라우스가 정부의 귀국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그의 준법 정신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는 국가를 염두에 두지 않은 개인의 입신출세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법정에서 웅변으로 맣은 사람을 변호해 큰 인기를 얻고, 또 사람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친절하게 대해 민중으로부터 호감을 샀다.

 

당시 로마에는 개선식을 올리고 싶어하는 장군은 교외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집정관에 입후보하려는 사람은 시내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공을 세우면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상을 내리고, 스스로 체력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극복하며 온갖 위험을 다 무릎쓰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 장병들을 감탄시켰다. 그는 체력이 허약하고 간질병 증세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군무를 치료법으로 생각하고 강행군과 간소한 식사, 쉴 새 없는 야영 등을 통해 병과 싸워 그것을 이겨 냈다.

 

이번에는 히페리데스가 그러면 언제 전쟁을 해야 하느냐고 따져 묻자, 포키온은 "젊은이들이 훈련을 달갑게 받고, 부자들이 나라에 돈을 내놓고, 정치인들이공금을 훔치지 않을 때 승산이 있소"하고 대답했다.

 

호민관은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 권한은 없지만, 여러 가지 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즉 다른 호민관들이 다 찬성해도 한 사람이 반대하면 무슨 일이든 집행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스파르타인이 부패하고 타락하게 된 것은 아테네를 정복하고 금과 은이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리쿠르고스가 제정한 호구수가 아직 남아 있고, 누구든 재산과 분배받은 토지를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법률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해, 질서와 평등의 이념이 계속 살아 있었다. 그나마 국가의 틀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 때 에피타데우스라는 자가 감독관이 되었는데, 그가 아들과 싸우고 난 뒤 누구든지 재산과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이 법안을 지지해, 부자들이 토지를 무제한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부가 극소수의 수중에 들어가고, 일반 시민은 빈곤에 허덕이며 적이 쳐들어와도 최선을 다해 싸우지 않고 변혁이나 혁명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시대의 영웅은 어떤 모습일까?  열정, 솔선수범, 선견지명......

2007. 8. 19. 부산에서 자작나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