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암송

이원규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자작나무의숲 2007. 4. 19. 21:54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나무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들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뀸구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전문희의 '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이야기'에 실린 이원규님의 시다. 안치환님이 이 시에 곡을 붙였는데, 이 블로그의 배경음악으로 등록되어 있다. 안치환님은 1987년 연세대에서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를 들려 준 이래 한결같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 부분이 마음속에 침잔한다. 2007. 4. 19. 혁명기념일에 부산에서 자작나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