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자작나무의숲 2006. 9. 4. 17:12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

   지금 사무실에서는 안치환의 ‘고백’이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나의 꿈들이 때로는 갈 길을 잃어 이 칙칙한 어둠을 헤맬 때.....”

나는 안치환의 노래를 좋아한다. 막힌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그 우렁찬 목소리, 주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서술하는 가사, 그가 노래를 하게 된 동기......

   그래서 나는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의 노래 ‘내가 만일’을 애창곡(18번)으로 2년째 삼고 있는 중이다(물론 거기에는 그 노래가 나에게 어울린다는 K판사의 후원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1987년 그의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어쨌든 많은 사람에 의하여 불리어 질 때 나도 그 노래를 꽤나 좋아했다. 그 무렵 안치환의 노래와 인연을 맺은 셈이다.


   나는 ‘헌법의 존립을 해하거나 헌정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배제되고 있는 동안(1983년 - 1986년) 대학교를 다녔다. 나는 그 때 열심히 사법시험 공부를 하였다. 헌정질서가 파괴되건 말건, 헌정질서가 파괴되는 것에 저항권을 행사하건 말건......

   그렇다고 20대 초반의 들끓는 피를 가지고 있던 내가 현실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게도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가 있었고, 당장 도서관에서 공부를 못하게 하는 최루탄이 있었다. 그래서 난 판단을 유보하였다. 시험을 끝내 놓고도 얼마든지 시간은 있다고.

   1986년 2차 시험을 끝내고 그 당시 유행이었던 공장체험을 해 보기로 하였다.민중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주장이나 실천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기득권 때문에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 당시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나는 내 이름으로 이력서를 쓰고(최종 학력을 속였지만 이건 무형위조로서 형사처벌이 되지 않고, 단지 해고사유로 될 수 있겠지만 곧 그만 둘 생각이었으므로 그것조차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법적 판단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1986. 8. 5. 서울 구로공단에 있던 진흥주식회사에 입사하였다. 근무시간은 8시간, 작업내용은 하루 종일 전자제품의 나사를 조이는 일이었고, 일당은 3,340원이었다.(그 당시 최저 임금이 월 100,000원으로 기억되는데 그 금액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일은 힘들지는 않았지만 매우 심심하였다. 하루에 1,500개 정도의 나사를 조였으므로 잠자리에 들면 천정에 나사구멍이 가득 나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나는 1986. 9. 9. 퇴사를 하였고, 그 동안 받은 월급으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사법연수원은 참으로 신나는 곳이었다. 월급을 받는다는 게 좋았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게 즐거웠다. 연수원 18기는 최초로 학회를 만들어 분야별로 모임을 가졌는데 나는 노동법연구회에 참여하였고, 아마도 많은 학회 중에 노동법연구회가 가장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연수원 자치회 주최로 사회봉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1년 차 연수과정이 끝나고 휴가기간 중 無辯村이나 YMCA같은 시민단체에 가서 법률상담을 했는데 그 상담을 끝내고 우리는 연수원 자치회 명의로 군 복무 대신에 무변촌 봉사활동(그 당시 군법무관 정원이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수의 연수원 수료자가 정훈, 공병 등 기타 병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을 하는 방법을 건의한 적이 있었는데 당국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내가 정훈장교로 온갖 고생 다하고 제대하고 나니 공익법무관 제도가 생겨 그 건의가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학회활동과 봉사활동도 지금 연수원의 공식 연수과정에 편입되어 의무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한다. 구하라. 그러면 언젠가는, 누군가는 거두리라.

 

   정훈장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연수원에서 귀하게 공부하던 버릇이 남아 있던 나로서는 처음에 정훈장교 생활이 못마땅했다. 한 계급밖에 안 높은 대위가 반말하는 것도 기분 나빴고, 동기생인 법무관들은 하지도 않는 위병근무를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것도 괜히 화가 났다. 1990년 3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이 아파 진해병원으로 후송간 일은 나를 슬프게 했다. 그렇지만 진해병원에서 한 6개월의 생활은 “병이 생기면 그 병을 통하여 메시지를 받고 이 메시지를 이해함으로써 하나의 반성의 기회로 삼게 되는 것이며, 생활영역에서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가 병으로 표출된 것”(칼 사이몬트 등, 「마음의 의학과 암의 심리치료」, 정신세계사)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많은 반성을 하게 하였다. 그 뒤 정훈장교 생활은 정말로 즐거웠다. 많은 장병들을 상대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그렇게 고마운 일인 줄 몰랐다. 지루한 정훈교육을 재미있게 하려고 그 당시 유행하던 유머시리즈를 수집하려고 서울을 왔다 갔다 하던 기억이 새롭고 그 당시 법무관으로서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Y판사의 도움도 잊을 수 없다. 남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노래는 더욱 못했던 내성적인 성격이 정훈장교 생활을 하는 동안 적극적인 성격으로 개조되었다. 내가 올해 5. 2. 법원 체육대회에서 100여 사람을 앞에 두고 판사실 대표로 노래 부를 줄을 그 전엔 꿈엔들 상상했으랴.

 

   제대를 얼마 앞두고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연수원 때까지만 하여도 변호사의 길을 가겠다며 여러 사람에게 떠들고 다녔던 것도 떠오르고 뭔가 책임지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연수원 때 실무수습기간을 떠 올렸다. 난 문제제기가 아니라 문제해결을 해보고 싶었다. 법원 실무수습기간 중에 본, 업무의 독립성, 절간같이 정돈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부산지방법원에 가면 鄕判으로 계속 그곳에 눌러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길지 않은 인생에 수십 번의 이사를 해 온 나로서는(이삿짐이라야 이불보따리와 책이 전부였지만) 이젠 大地에 정착하고 싶었다. 나는 결정했다. 부산지방법원의 판사가 되기로.....

 

   작년에 모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고 3 후배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는데 거기서 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판사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냐”고. 그 때나 지금이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판사가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던 같다. 경력 30년의 원장님이 초임판사를 정중하게 예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수평적 인간관계, 개성은 존중되나 자기 책임에 철저한 professiona lism, 싫은 일을 강요하지도 강요당하지도 아니하는 분위기, 왠지 믿음이 가고 정다운 사람들......

   이것들이 내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었고, 나아가 다음과 같은 일화는 나를 영원히 이곳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1996년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 형사단독을 마치고 1997년 9월경 부산지방법원에서 가사단독을 맡고 있을 때인데 50대의 웬 아저씨가 판사실로 쑥 들어와서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자리도 권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더니, 그의 아들이 1996년 나한테서 형사재판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억울함을 풀어 답례를 하고자 찾아왔다며 양주를 선물로 내놓는 게 아닌가. (내 자랑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님을 독자들은 이미 눈치 챘으리라)

   1998년 3월 초 부산구치소의 기결수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1996년 나한테서 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인데 1998. 3. 5. 출소할 예정이라며 많은 것을 반성하고 있으며 “판사님께 실망시키지 않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원했고,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결정할 수 있고, 또 내가 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판사. 국민으로부터 의심 어린 눈초리와 못 미더운 눈빛도 받은 적도 있었지만 법원만큼 自然治癒力을 갖고 있는 국가기관도 드물다고 생각해 본다.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하면서 “불의가 법을 유린할 때 그건 불법이다. 불의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그건 정의가 아니다” 라고 선언하지 못한 과거를  스스로를 반성할 줄도 아는 판사들의 법원.


   안치환의 노래는 종반부를 치닫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길은 멀은데 가야할 길은 더 멀은 데 비틀거리는 내 모습에 비웃음 소린 날 찌르고 어이가나 길은 멀은데...... ♪♪”

       1998. 9. 1. 법원회보에 부산고등법원 판사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