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소설)

황야의 이리

자작나무의숲 2016. 6. 5. 09:42

1. 개괄

헤르만 헤세가 쓴 <황야의 이리>를 읽었다. 저자는 1877년 독일 남부에서 태어났고, 1927년 이 작품을 출간하였으며, 1946년 노벨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 사망하였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이고 고백적인 작품으로서 충격적인 소재, 작가의식의 치열성, 다채로운 형식실험에서 헤르만 헤세의 가장 대담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2. 발췌

인간의 삶이 정말로 고통으로, 지옥으로 변하는 건 두 시대, 두 문화, 두 종교가 서로 교차할 때입니다. 어떤 고대인이 중세에 살았어야 했다면, 그는 그것 때문에 애처로우리만치 숨막혀했을 것입니다. 그건 한 야만인이 우리의 문명 한가운데에서 숨막혀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지금은 한 세대 전체가 두 세대 사이에, 두 개의 생활 양식 사이에 끼여, 어떠한 자명한 이치도, 도덕도, 어떠한 안정감이나 순수함도 상실해버린 시대입니다. 


요컨대 황야의 이리는 두 개의 본성, 즉 인간의 본성과 이리의 본성을 함께 지녔다. 이것이 그의 운명이었다...그에게는 인간과 이리가 병존하지 못했고, 서로 돕는 일은 더 더욱 없었으며, 둘은 줄곧 철천지 원수처럼 맞서서 한 쪽이 다른 쪽을 괴롭혔다.


아무리 불행한 삶도 나름의 행복한 시간이 있는 법이다. 모래와 자갈 사이에서도 작은 행복의 꽃은 핀다.


세상을 부정하면서 세상에 사는 것, 법을 존중하면서도 법을 넘어서는 것, 소유하지 않는 듯이 소유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듯이 포기하는 것-자주 인용되고 즐겨 요구되는 이 모든 고귀한 삶의 지혜들을 실현시켜 주는 건 오직 유머뿐이다.


영혼은 무수하다. 인간은 수백 개의 껍질로 된 양파이고,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다.


인간이란 결코 확정적이고 영속적인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시도요 과도이며, 자연과 정신 사이에 놓인 좁고 위험한 다리에 지나지 않는다.


순간은 찬란하게 빛나다가도 비참하게 조락하는 것이며, 아름다운 감정의 절정도 일상이라는 감옥을 감수한 대가로서만 주어지는 것이고, 정신의 왕국을 향한 저 불타는 동경도 자연의 잃어버린 순수성에 대한 타오르는 성스러운 사랑과 영원히 필사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검은 독수리>에서 춤을 추던 그 작고 귀여운 미지의 소녀를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것은 바로 <살 수 없음>과 <죽을 수 없음> 사이에 놓인, 이 견딜 수 없는 긴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도대체 우리 인간은 죽음을 없애기 위해 사는 것인가요? 아니에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런 다음 다시 죽음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거예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보잘것없는 인생도 어느 순간 그렇게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거예요.


음악에서는 옳은 판단이나, 취향, 교양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 음악을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바라는 건 속죄하고 속죄하고 또 속죄하는 것, 도끼 아래 모가지를 내밀어 벌을 받고 처형당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 자네는 언제나 너무 비장해! 그러나 곧 유머를 배우게 될 걸세, 하리. 진정한 유머는 모름지기 교수대에서의 유머지.


자네는 살아야 하고 웃음을 배워야 하네. 자네는 인생의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그 뒤에 숨은 정신을 존중해야 하고, 거기서 야단법석을 떠는 걸 비웃을 줄 알아야 하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 소감

번역자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인간이 된다는 먼 가능성은 고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지함을 상대화함으로써, 즉 유머를 통해 이루어진다. 유머는 '위대한 일을 행하라는 소명을 받았으나 이를 저지당한 비극적인 사람들의 탁월한 발명품'이라고 한다.


소재, 형식, 문제의식 모두 놀랍다.


                           2016. 6. 5.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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