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괄
프레드 로델이 쓴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를 읽었다. 저자는 예일대학교 로스쿨 헌법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법현실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형식주의 법학의 추상성과 폐쇄성을 비판하는 데 주력했다. 저자는 1933년 26살의 나이에 예일대학교 로스쿨의 조교수로 부임하였고, 32살에 이 책을 펴냈으며, 그후 미국 법학의 악동으로 불리었다. 저자는 법이 자랑하는 확실성이 단지 신화에 불과함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서문을 쓴 제롬 프랭크 판사조차도 법률가와 법관에 대한 로델의 비난은 확실히 극단적이고, 법조계의 위선과 이기심에 부당하게 과도한 책임을 돌리고 있다고 평가한다.
2. 발췌
의학, 수학, 사회학, 심리학과 같은 대다수 학문의 목적은 앞을 내다보고 새로운 진리, 기능, 유용성에 다가서는 데 있다. 오직 법만이, 자신의 오랜 원칙과 선례에 끊임없이 집착하며, 구태의연을 덕으로, 혁신을 부덕으로 삼는다.
법은 그러므로 제정법에 대해 우월한 것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대해서도 우월하다. 그리고 법의 신화에 따르면, 우리의 생활을 규율하는 최종적인 규칙은 헌법도 성문법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법이다.
법은 애매하고 추상적인 원칙의 덩어리다.
우리는 모두 헌법 아래 있다. 그러나 헌법이란 법관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찰스 에반스 휴스)
다시 말해, 그들은 먼저 판결하고 나중에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법적이 아닌 실질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게 된다.
모든 법적 원칙은 어떤 법적 결정에 대한 합리화, 정당화, 이유 붙이기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그 원칙이 이후에 다른 결정의 합리화에 많이 이용될수록 그 명성은 높아진다.
법은 일관성과 확실성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반드시 지녀야 한다.
오늘날 사용되는 영어 가운데 법의 언어만큼 공허하고, 혼란스러우며, 그 담겨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법률 언어는 모호함과 전적으로 이해 불가능함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
법이란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의 일상에서 겪는 평범한 사건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이 그런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의'라는 개념을 법적 문제의 해결에 적용하고자 하는 법률가나 법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는 흐르고 삶의 방식은 변하고 인간사의 양상도 변화하지만, 법의 원칙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은 채 그대로다.
새로운 게임의 규칙, 새로운 인간 활동의 처리 방식, 새로운 실용과 공정에 관한 기준은 오래된 기준, 오래된 처리 방식, 오래된 사고에 비해 법적 원칙의 구조에 덜 매끄럽고 덜 편안하게 들어맞는다. 이것은 수많은 '진보적 입법'이 법원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거나 무효로 해석되는 이유다.
답은 하나다. 그 답은 법률가를 제거하고 대문자의 L로부터 시작되는 법을 우리의 법체계로부터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우리의 문명을 보통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정의와 공평함에 봉사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알기 쉬운 규범에 따라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구체적인 문제를 공평하게 해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만드는 종류의 지식이란, 문제가 비롯된 분야에 대한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지식이다.....이런 지식은 사람이 문제를 더 명쾌하고, 상세하고,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리하여 각자의 정의감을 토대로 문제를 더 지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
3. 소감
법의 언어가 더 쉽고 명확해야 한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법관이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헌법과 법률을 제정해서는 아니 된다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이 책의 상당 부분은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있다. 특히 저자는 법률가를 제거한 자리에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을 앉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사람이 일관성과 확실성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논증이 부족하다. 실제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면 상반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어떤 전문가가 사건 처리를 해야 하나?
2014. 2. 3.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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