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07. 12. 15. 18:24

파스칼의 '팡세'를 읽었다. 파스칼은 1623년에 태어나 1662년 3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초기에 과학자로서 놀라온 업적을 일궈냈지만, 1656년 장세니스트들에 대한 예수회의 공격에 대응하여 장세니즘을 변론하게 되면서 기독교 신앙에 매달려 기독교 호교론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최초의 대중 교통수단인 승합마차를 고안하여 파리 시내에서 운행되게 한다. 팡세는 그가 죽은 한참 뒤인 1670년 '종교 및 기타 주제에 관한 파스칼의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기독교 호교론이다. 호교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제1부는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이고, 제2부는 신 있는 인간의 복됨이다. 즉, 인간성이 타락하였음을 보여주고, 인간을 구원할 구속자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호교론은 종교가 결코 이성에 어긋나지 않음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종교에 대한 멸시의 마음을 존경의 마음으로 돌려 놓은 다음 종교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불어넣는 것이 그의 두 번째 과제이다. 한마디로 팡세는 전반부의 인간학과 후반부의 신학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간에 이 이질적인 양자를 접합하기 위한 연결부분이 있다. 

 

인간의 비참을 삶의 모든 층위에서 예리하게 추적한 파스칼은 여기서 새로운 주제를 개입시킨다. 인간이 자신의 상태를 비참으로 느끼는 이 의식이 바로 인간의 위대를 반증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비참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역설이 파스칼의 핵심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비참하다는 것보다 이 비참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성의 원리에 입각할 때 우리는 신이 있다고도 또 신이 없다고도 확언할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는 피장파장이다. 그러나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중에서 어느 편이 우리게게 수지맞는가를 따져보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지극히 타산적인 계산 방법이며 파스칼은 내기의 확률론을 동원하여 <신이 있다>가 압도적으로 이롭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신을 알지 않고는 행복이 없고 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행복해지며 따라서 궁극의 행복은 신을 확실히 아는 데 있다는 것, 그리고 신에게서 멀어질수록 불행해지고 따라서 궁극의 불행은 반대의 것을 확신하는 데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열병에는 오한도 있고 열기도 있다. 오한은 열기와 마찬가지로 열이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의 법관들은 이 비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붉은 법의, 털 고양이 같이 몸을 휘감은 담비 모피, 그들이 재판하는 법정, 백합꽃, 이 모든 근엄한 장치들은 응당 필요했다....사람들은 이처럼 당당한 외양에 오금을 못 쓴다. 만약 법관들이 진정한 법을 가지고 있고 또 의사들이  참된 의술을 가지고 있다면 사각모 따위는 그들에게 필요 없을 것이고 이 지식의 위엄은 그 자체로써 충분히 존경받을 것이다.

 

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옳고 더 강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이다.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힘 없는 정의는 반대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사악한 자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힘 없는 정의는 규탄받는다. 그러므로 정의와 힘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는 논란의 대상이지만 힘은 매우 용이하게 식별되고 논란의 여지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의에 힘을 부여할 수가 없었다. 힘이 정의에 반대하고 그것을 불의라고 말하며 또 정의는 바로 자기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은 정의를 강하게 할 수 없었으므로 강한 것을 정의로 만들었다(105면).

 

시간은 고통과 분쟁을 진정시킨다. 사람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제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을 짐승과 같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또 천사와 같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둘다 몰라서도 안 된다. 둘 다 알아야 한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중간에 머물 줄 아는 데 있다. 위대함은 중간에서 벗어나는 데 있기는커녕 거기서 벗어나지 않은 데 있다.

 

두려움, 신을 믿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 좋은 두려움은 신앙에서 오고 잘못된 두려움은 의심에서 온다......전자는 신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후자는 그를 만날까 두려워한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거나 지나치게 짧으면 뜻이 흐려지고 지나친 진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인간은 절망 또는 교만이라는 이중의 위험에 항상 처해 있으므로 은총을 받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는 이중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교리보다 인간에게 더 적합한 교리는 없다.

 

다양성 없는 통일은 외부의 사람들에게 무익하고, 통일 없는 다양성은 우리에게 파멸을 가져온다. 전자는 외부에 해롭고, 후자는 내부에 해롭다.

 

권력자들의 즐거움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데 있다. 부의 특성은 아낌없이 주어지는 데 있다.

 

너희가 두려워하고 있다면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면 두려워하라.

 

위대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것에서 떠나 있을 필요가 있다. 지속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 불쾌감을 준다. 우리 몸을 덥히기 위해서는 추위도 기분 좋다.

 

유고논문이 대개 그러하듯이 온전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주제도 어렵고 제시되는 근거도 다양하고 풍부하다. 영원의 행복을 생각해봤다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습관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신뢰받는 증명을 이룬다>는 서문을 읽으면 이 책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으리라는 것을 눈치채리라.

 

         2007. 12. 15. 부산에서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