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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법정에서 들려오는 동서고금 지혜의 말

자작나무의숲 2007. 8. 3. 21:14
법정에서 들려오는 동서고금 지혜의 말
창원지법 법언·인용구 ‘화제’
2005년 09월 09일 (금)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법정에서 선고를 앞두고 재판부가 입에 올리는 말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 법언(法諺)·고사성어(故事成語)나 고전(古典)의 특정 문장을 끌어오기도 하고 사실(史實) 또는 보기를 들기도 한다.

이는 모두 잘못을 저지른 피고인을 깨우치거나 사건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규정하고자 하는 목적을 띠고 있다. 지난달 31일 뇌물 혐의로 기소된 김종규 창녕군수에게 징역 2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한 창원지방법원 제3형사부(재판장 문형배 부장 판사)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율기(律己)편에서 한 구절을 끌어와 공직 부패를 바라보는 재판부의 시각을 뚜렷이 드러내 보였다.

문 재판장은 이날 315호 대법정에서 “염자(廉者) 목지본무(牧之本務) 만선지원(萬善之源) 제덕지근(諸德之根)”이라 했다. ‘청렴은 목민관의 근본 의무로 오만가지 착함의 원천이며 모든 덕행의 뿌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단체장이 부패하면 그 아래 있는 공무원들이 풀어지기 쉽고 주민들에게 곧장 피해가 돌아가는 만큼 부패가 명백하게 입증된 경우에는 엄정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지난 6월 29일 자신의 창원시의장 당선을 위해 아내를 시켜 동료 의원에게 1000만원을 건넨 혐의로 재판을 받던 배영우 당시 의장을 법정구속할 때도 이 재판부는 법언을 끌어와 법원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도 뇌물 사건을 엄벌할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날 재판부는 2003년 여론조사에서 법원 판결에 국민의 80% 이상이 불공정하게 여긴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이는 갖가지 부패 사건에 대해 법원이 ‘온정주의적으로’ 판결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법원은 정의 실현 그 자체보다 정의를 실현한다고 국민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법언(法諺)을 소개한 다음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사법부가 두 번째로 믿을만한 기관으로 꼽힐 만큼 회복됐는데 그 믿음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이 재판부는 지난해 남편 김정부 의원의 당선을 위해 2억원을 웃도는 돈을 뿌렸다가 경찰에 들키자 달아나버린 정화자씨의 궐석 재판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달아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를 사실로 들며 징역 2년을 선고해 눈길을 끌었다.

문 재판장은 이날 정씨가 부정금권선거로 기소된 점을 감안한 듯 1960년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일어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마산의거를 거론하며 “민주 성지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마산에서 이번 사건이 터져 참으로 유감”이라고도 했다. 또 정씨 돈선거 사건을 일러 “금권선거의 완결판”이라 규정하면서 마산의거 당시 고교 신입생으로 목숨을 잃은 김주열‘님’과 당시 고교생으로 뇌성마비를 무릅쓰고 시위에 참가한 장애 시인 이선관‘님’을 거명해 법정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한편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승진 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황철곤 마산시장에게 무죄를 선고할 때인 지난달 10일에는 몽테스키외가 쓴 <법의 정신>에서 한 구절을 따왔다. 이날 재판부는 <법의 정신>에 나온다는 ‘이성은 두 사람의 정신을 요구한다’는 말을 들어 증거는 최소한 두 개는 돼야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재판부의 이 같은 끌어쓰기(引用)나 들어보이기(擧示)가 정치인이나 공직자의 부패 사건에만 한정돼 있지는 않다. 창원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문형배 부장 판사)는 6월 29일 의무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자신의 차량으로 사람을 치어 기소된 조모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4월형만 선고한 1심을 깨고 집행유예 2년을 덧붙이면서 ‘불벌중책(不罰衆責)-많은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처벌할 수 없다’를 들먹였다. 조씨는 2004년 8월 밤늦게 비가 내리는 편도 1차로에서 시속 50km로 자동차를 몰다 길 한복판에 누워 있던 사람을 치어 중상을 입혔는데 이날 재판부는 “그런 상황이라면 판사인 나라도 피할 도리가 없었겠다”며 합의가 안됐는데도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또 9월 7일 무면허 음주 운전으로 1심에서 징역 4월을 선고받은 최모(24)씨를 벌금형으로 풀어줄 때는 ‘갈치 가운데토막론(論)’을 들었다. 재판부는 “쓸데없는 말은 말아야 하나 한 사람이라도 새겨들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한 마디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갈치가 긴 것 같지만 머리 떼어내고 꼬리 잘라내면 얼마 남지 않는다. 가운데토막은 아주 짧은데 그조차 내장을 덜어내고 나면 정말 남는 것 없다”며 “인생도 마찬가지다. 얼핏 보면 길다 싶지만 이래저래 빼버리면 갈치 가운데토막보다 더하다”고 했다.

이어서 “인생에서 갈치 가운데토막은 18살부터 36살까지다. 피고인은 24살이라 12년이나 남았다 할는지 모르지만 살아보면 아주 짧고 그 뒤에는 뭔가 새롭게 고쳐 살아보려 해도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다”면서 젊은 한 때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부패 사건을 전담하는 합의재판부인 제3형사부는 ‘온정주의적 판결’을 하지 않는 대가로 심리적인 부담과 스트레스를 상당히 크게 느낀다고 알려져 있다. 배영우 의장이나 김종규 군수 같이 증거가 분명한 불구속 피고인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까지 할 경우에는 판결 전후에 잠조차 이루지 못한다는 얘기가 들리고 있다. 이런 고달픔은 판사 직종에 고유한 ‘직업병’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언젠가는 이를 가장 적실하게 나타내는 사실이나 보기, 고전 인용문 또는 법언 혹은 성어를 법정에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