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스위스, 파리 여행을 다녀와서 3(바젤)

자작나무의숲 2006. 10. 30. 20:23

바젤은 스위스와 독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도시로서 라인강의 상류지역이기도 하다.

아침에 박후남 선생의 안내로 바젤 고등법원, 바젤민사법원을 견학할 기회를 가졌다. 바젤고등법원에는 3분의 원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선임인 피셔님의 스위스 사법제도의 소개가 있었다. 피셔 원장님은 은퇴를 앞두고 있는 고령임에도 선 채로 40분에 걸쳐 바젤 법원을 소개해주셨다. 중간에 앉으셔서 말씀 하시라고 하였더니 하루 종일 앉아서 근무하니까 서서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고 응답하시며 끝까지 선 채로 말씀 하셨다. 그 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바젤 법원은 1901년 설립되었고 1905년부터 행정재판소를 갖고 있다.법관은 전임법관과 겸임법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임법관은 한국식으로 말하면직업법관인데 주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고 임기가 있으며 정당의 추천을 받는다. 겸임 법관은 별도의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1주일에 1-2일 법원에 나와서 재판에 관여한다. 소송관계 서류는 집에서 검토한다. 겸임법관도 주민의 투표로 선출되며 바젤법원에는 6명이 있는데, 예비요원으로 주의회에서 선출된 8명이 있다.

 

재판부는 1인 재판부에서 5인 재판부까지 구성되는데, 3주 내지 5주에 해당하는 형벌은 1인 재판부에서, 그 이상 징역 3년 이하는 3인 재판부에서, 살인과 같은 중범죄는 5인 재판부에서 재판을 한다. 5인 재판부는 2명의 전임법관과 3인의 겸임 법관으로 구성되고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론적으로 3인의 겸임법관(직업법관이 아님)이 전임법관의 뜻과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셈인데, 실제로는 그런 예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피셔 원장의 법정에서 사진촬영을 마치고 그의 안내로 바젤민사법원으로 이동하였다. 바젤고등법원과 바젤민사법원은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바젤민사법원으로 옮겨서 재판을 참관할 기회를 가졌다.

법정은 한국 법정보다 훨씬 작았고, 법대는 한국 법정보다 낮았으며, 법정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이 엄격한 한국 법정과 달라 보였다. 특이한 것은 법원서기도

대부분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법대에 법관과 같이 앉아 있으며, 조서정리 뿐만 아니라 판결문 작성까지 한다고 하였다. 법원서기 중에서 법관으로 선출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였다.

 

우리 일행이 참관한 재판은 총 2건이었는데, 1건은 화해가 성립되었고, 1건은 피고가 불출석하여 판결선고까지 이루어졌다.

 

화해가 성립한 사건은 피고가 통닭집을 경영하는 사람이고 원고는 임대업자인데, 피고가 냄새를 심하게 피우는 바람에 원고가 세입자들에게 월세를 깎아주었다며 피고에게 그 배상을 구하는 사건이었고, 9,500 스위스 프랑 (한국 돈 약 720만 원)에 합의가 성립되었다. 재미난 것은 피고 변호사가 돈을 재판장에게 건네주었고, 재판장이 돈을 세워본 다음 원고 변호사에게 건네주었으며, 법원서기가 볼펜으로 합의내용을 노트에 적은 다음 변호사들에게 서명을 받음으로써 절차가 종결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한 사건은 월세를 청구한 사건인데, 피고가 불출석하였고, 원고 및 우리 일행을 내 본 다음 합의를 하더니 다시 원고 및 우리 일행이 참석한 상태에서 판결을 선고하였다.

 

두 사건은 모두 3인 재판부에서 했는데, 2인은 전임법관이고, 1인은 겸임법관이었으며, 재판장은 다른 전임법관보다 젊어 보였으며, 겸임 법관은 3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들어보였다.

 

점심시간이 되어 라인강가에 있는 식당에서 위 재판부 소속 하이얼리 판사와 식사를 하였다. 소고기로 만든 양식인데, 가격은 29 스위스 프랑 정도였고, 아주 맛있었다. 점심 시간을 이용하여 하이얼리 판사와 대화가 오갔는데, 그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해 있고, 취미는 고양이 기르기와 헝가리 출신 아내의 전시회를 도와주는 것이며, 이민 2, 3세를 위한 자원봉사를 한다고 하였다. 그는 3인 재판부 소속으로 있으면서 별도로 1인 재판부를 구성하였다. 나이는 40대로 보였다.

 

바젤민사법원에서는 2/3 정도가 판결까지 가지 아니하고 조정이나 화해 등으로 처리된다고 하였다. 바젤민사법원에서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은 이혼사건이라고 하였다. 바젤민사법원에는 7명의 전임법관이 근무한다고 하였다.

 

식당에서 보는 라인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우선 강폭이 좁고 그 양 옆으로 고풍스러운 중세 시대의 건물이 늘어서 있어 한폭의 그림 같았다. 저 멀리서 제약회사의 현대식 고층 건물이 한 채 있었는데, 눈에 아주 거슬렸다. 실제로 그 건물을 지을 때 주민투표가 있었고 논란 끝에 건축하기로 결정이 났다고 한다. 그 제약회사는 바젤대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기관, 단체에 거액의 기부금을 낸다고 한다.

 

박후남 선생의 안내로 바젤대학교를 견학했는데, 바젤대학교는 볼로냐 대학 다음으로 오래된 대학으로서 1400년 경 설립되었다고 한다. 1학기 학비는 우리 돈으로 500,000원 정도라고 한다. 대학건물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저녁 식사까지 3시간의 여유가 있어 잠시 쉬기로 하고 일행이 호텔에 돌아왔는데 스위스까지 와서 호텔에서 쉰다는 것은 낭비라며 의기투합하여 30분 정도 걸어서 라인강가로 갔다. 산책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라인강가는 가벼운 소음을 내고 있었다. 일행 중 최oo 판사, 한oo 계장은 3킬로 정도 조깅을 하였다. 강가에 두 줄로 나무가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길이 놓여 있었는데, 1시간 남짓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서려니 언제 이런 길을 산책할 수 있겠나 싶어 안타까웠다.

 

저녁엔 박후남 선생의 남편인 젤만 교수와 함께 저녁을 하였다. 젤만교수는 독일인으로서 11년 전에 스위스로 이주하여 바젤대학교의 형법 및 법철학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데 식사자리에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형벌의 목적은 응보, 교화, 사회방위 어느 하나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법이 지켜진다는 믿음도 그 중 하나이다. 사형폐지는 스위스에서 30년 이상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사형제 폐지 후 범죄가 증가했다는 증거가 없고, 오판의 우려, 국가가 이성적 상태에서 살인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식사 후에는 젤만 교수의 초청으로 그분의 집을 방문하여 와인을 마셨다. 집은 2층 짜리 건물로 남진의 노래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었다. 일행이 위 노래를 소개하며 집이 아름답다고 했더니 젤만교수가 크게 웃었다.

호텔로 돌아올 때는 젤만교수 부부가 차를 2대 동원하여 전철 타는 데까지 바래다 주었다. 바젤에서는 전철이 주된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눈물이 글썽이는 박후남 선생을 보니 36년 이상 외국생활을 해도 한국인의 정은 쉽게 망각되는 게 아닌가 보다. 호텔에 돌아오니 11시였다. 오늘 밤은 잠을 좀 자야할텐데...

 

(스위스 바젤 라인강변에서)

 

                         2006. 10. 30. 창원에서 문형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