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문)

팡세를 다시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8. 6. 23. 12:30

1. 개괄

파스칼이 쓴 '팡세'를 다시 읽었다. 기독교 호교론을 위한 수기들인데 사후에 단장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상태를 비참으로 느끼는 이 의식이 바로 인간의 위대를 반증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불신자와 더불어 종교는 완전히 명료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이성은 신의 본질은 물론 존재 여부도 알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대신에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둘 중에서 어느 편이 우리에게 더 수지맞는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타산적인 계산 방법이며 파스칼은 내기의 확률론을 동원하여 신이 있다가 압도적으로 이롭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2. 발췌

존경의 의미는 부자유를 참아라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해롭다. 미움을 사기 때문에.

 

정의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힘은 매우 용이하게 식별되고 논란의 여지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의에 힘을 부여할 수 없었다. 힘이 정의에 반대하고 그것을 불의라고 말하며 또 정의는 바로 자기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은 정의를 강하게 할 수 없었으므로 강한 것을 정의로 만들었다.

 

신이 있다는 패를 택한 다음 득과 실을 저울질해 보자. 다음 두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당신이 지는 경우에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신이 있다에 걸어라.

 

다양성 없는 통일은 외부의 사람들에게 무익하고, 통일 없는 다양성은 우리에게 파멸을 가져온다-전자는 외부에 해롭고 후자는 내부에 해롭다.

 

교부들은 이 두 진리 중 하나를 내세우되 다른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하나로 환원되지 않은 여럿은 혼란이고 여럿에 의존하지 않은 하나는 압제이다.

 

3. 소감

파스칼은 당대에 위와 같은 신념 때문에 예수회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팡세가 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앞서 갔고 그래서 지금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2018. 6. 23.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