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개괄
E. F. 슈마허가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읽었다. 저자는 1911년 독일에서 태어나 스물두 살부터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1973년 이 책이 출간되었다.
성장지상주의에 성찰과 반성의 근거를 제공하고 소박한 수준에서 대안을 모색한다. 경제구조를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방안으로 '작은 것'을 제시한다. 경쟁과 속도전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한 경제 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하는 경제구조가 확보될 수 있다고 본다.
2. 발췌
인간의 본질은 국민총생산으로 측정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상실의 징후를 제외하고는 결코 무엇도 측정할 수 없다.
소규모 사업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항상 대규모의 사업에 비해 자연 환경에 적은 해악을 끼치는데 이는 소규모 사업의 개별적인 힘이 자연의 회복력에 비해 작기 때문이다.
지혜의 책은 수 없이 많지만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을 발견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탐욕과 이기심의 지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도시 규모라는 문제를 보자. 이에 대해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필자는 도시 규모의 적절한 상한선을 인구 50만 명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 선을 넘으면, 그 어떤 도시의 장점도 나타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오늘날 전 인류가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음은 거의 의심할 나위가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과학기술의 노하우를 부족하게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혜가 결여된 채 이 지식을 파괴적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좀더 많은 교육은 그것이 좀더 많은 지혜를 산출하는 경우에만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적어도 앞으로도 백년 동안은 나쁜 일은 유용하지만 옳은 일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옳은 일은 나쁘고 나쁜 것이 옳다는 점을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상당 기간 동안 탐욕과 고리대금, 그리고 경계심을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케인즈).
우리의 근본적인 확신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교육은 단순한 훈련이거나 방종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혼란에 빠진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확신 자체이며, 또 현재의 반형이상학적인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이 혼란은 더욱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육은 인류의 최대 자원이기는커녕 '최고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이라는 원리에 따라 파괴의 도구가 될 것이다.
문명인이든 미개인이든, 인간은 자연의 자식이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다.
필자는 기술발전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 방향은 기술을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추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작은 존재이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거대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자기파괴로 나아가는 것이다.
빈곤의 요인 중에서 자연자원 부족, 자본 부족, 하부구조의 불충분성같은 물질적인 요인은 완전히 2차적인 것이다. 극단적인 빈곤의 주요 원인은 비물질적인 것인바 교육, 조직, 규율 등의 결함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가난에 찌든 지역에서 경제개발은 필자가 중간기술이라 불렀던 것에 기대지 않으면 성과를 볼 수 없다...이러한 중간기술은 토착 기술보다 엄청나게 생산성이 높지만, 근대 산업의 복잡하면서도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기술에 비하면 엄청나게 저렴할 것이다.
최상의 원조는 지식 원조, 즉 유용한 지식의 증여이다.
중앙은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만, 창조적인 기여를 이끌어낼 만한 힘은 없다.
3. 소감
기업의 이윤세를 폐지하는 대신에 주식의 절반을 공공기관이 소유한다는 주장과 같이 낯선 주장도 있다.
2017. 7. 2. 부산에서 자작나무
'독서일기(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의 탄생을 다시 읽고 (0) | 2017.12.10 |
---|---|
공감의 시대를 다시 읽고 (0) | 2017.12.01 |
호모데우스를 읽고 (0) | 2017.06.08 |
안목을 읽고 (0) | 2017.03.26 |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읽고 (0) | 2017.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