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5. 11. 13. 20:09

1. 개괄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었다. 문학사상 2015년 10월호 권영숙 선생의 글에서 이 소설이 인용된 것을 보고 읽게 되었다. 작가는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고, 44살에 등단하여 한달 동안 평균 1천여 매를 쓰는 집필활동으로 80여 권의 작품을 남겼다. 이병주전집 중 28번 째 발간된 이 책에는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하여 매화나무의 인과, 쥘부채, 패자의 관,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 등 5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2. 발췌

체온 36도 5분으로써 육체의 빙화는 피한다고 해도 마음의 빙화까지 피하기란 어렵다. 그래 노상 책에다 눈을 쏟고 있는 편이지만 종이 위의 활자가 내 눈으로 전달되는 그 도중에 얼어붙는 탓인지 충주신경에까진 이르지 못하고 만다.

 

영하 20도는 영하 31도보다는 덜 차다. 설혹 영하 30도가 된다고 하더라도 영하 31도보다는 덜 차가운 것 아닌가. 인간의 극한상황이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을 두고는 없다.

 

감옥살이에서 체험한 일이지만, 지식인과 무식자는 똑같은 곤란을 당했을 때 견디어내는 정도가 월등하게 다른 것 같다. 지식인의 경우 감옥 속에 있어도 꼭 죽어야 할 중병에 걸리지 않는 한 호락호락하게 잘 죽지 않는다.

 

교양인, 또는 지식인은 난관에 부딪혔을 때 두 개의 자기로 분화된다. 하나는 그 난관에 부딪혀 고통을 느끼는 자기, 또 하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자기를 지켜보고, 그러한 자기를 스스로 위무하고 격려하는 자기로 분화된다. 그러니 웬만한 고통쯤은 스스로를 위무하고 지탱하고 격려하면서 견디어낸다.

 

고마운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흐르는 시간과 더불어 생명의 흐름도 고갈하겠지만 그것도 좋다. 죽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만약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간악한 인간들은 천년만년의 징역을 만들어낼 것이 아닌가

 

존재란 이 금지규정에 의해서 비로소 성립한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먹어선 안 된다는 건 먹여야 산다는 절실한 사정 위에서만 있을 수 있는 금지규정이다.

 

불법이지만 정당하고, 합법이지만 부당한 인간행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미묘한 인생에의 이해에 입각해서, 한정되고 불안한 법률의 능력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을 위한 법률운용이 가능한 것이라고 본 변호인은 믿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는 실천이다. 사랑이란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이상 소설 알렉산드리아)

 

아마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죽는다. 그럼 마찬가지 아닌가

(콩스탕)<패자의 관>에서 재인용

 

진실로 인간은 더러운 강물과도 같다. 스스로를 더럽힘 없이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모름지기 바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쥘부채에서 재인용)

 

3. 소감

책을 잡으면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이병주 소설을 좀 더 읽어봐야 겠다.

 

          2015. 11. 13.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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