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추천)

재판관의 고민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5. 6. 24. 08:30

1. 신동운의 <재판관의 고민>

신동운 편저의 <재판관의 고민>을 읽었습니다. 편저자는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이 책은 제1부에 유병진 판사가 1952년 3월 쓴 <재판관의 고민>을 복간하여 실었고, 제2부에 유병진 판사가 집필한 9편의 법률논문과 논설, 2편의 수상을 실었으며, 부록으로 김이조 변호사가 쓴 유병진 약전이 붙어 있습니다.

편저자의 말에 따르면, 유병진 판사는 1958년 간첩죄와 국가보안법위반죄 등으로 기소된 조봉암 피고인에 대하여 제1심 재판장으로서 5년형을 선고하면서 간첩죄 부분에 대하여는 무죄를 선고하였고, 조봉암은 항소심에서 간첩죄가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대법원 또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편저자의 말에 따르면, <재판관의 고민>은 유병진 판사가 9ㆍ28 이후 서울 재후퇴 시까지 사이에 서울지방법원에서 취급한 부역자처단에 관하여 고뇌의 과정을 회고하여 보려고 출간한 단행본이고, 여기에는 6ㆍ25 당시의 재판상황을 알려주는 것을 넘어서 이후 조봉암 사건에서 무죄판결의 근저를 이루게 되는 그의 법철학적 사고형성 과정을 소묘하고 있습니다.

편저자의 말에 따르면, 유병진 판사의 법사상은 현실주의법학과 기대가능성이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김이조 변호사가 쓴 유병진 약전에 따르면, 유병진 판사는 1958. 12. 10. 연임이 거부되어(당시 대법원장 조용순) 변호사로서 활동하다가 1966년 별세하였으며, 저서로는 <한국형법총론>, <한국형법각론>, <형사소송법개요>가 있고, 1994년 법의 날 무렵 KBS 텔레비전에서 유병진의 생애를 “다큐멘터리 극장”으로 방영하였습니다.

 

2. 유병진 판사의 <재판관의 고민>

유병진 판사는 서울지방법원 단독판사로서 부역자처단 사건을 처리하였는데, 부역자처단 사건은 단심제였고, 기소 후 20일 이내에 공판을 열어야 하며, 40일 이내에 판결을 선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1950. 6. 25. 제정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따르면, 비상사태에 승하여 적에게 정보제공 또는 안내한 행위, 적에게 무기, 식량, 유류, 연료 기타의 금품을 제공하여 적을 자진방조한 행위의 죄를 범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유병진 판사가 부역자처단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나’ 아니 ‘환경’의 탐색을 합니다.

‘내가 만약 서울에 남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에 있어서 나는 모든 죄수들에게 내가 취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없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그 행동의 표준이 될 만한 존재라는 것보다도 일개의 재판관으로서 그 재판관이라는 양심에서 그들에게 나의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가 전연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수도 함락 직후 서울을 탈출하여 그동안 안전지대에 난을 피하였던 자라는 점이다’ ‘아내와 이별하고 나는 혼자 모험의 길에 들어섰다’ ‘가족을 찾아 집에 돌아와 보니 세 살짜리 규성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2) 고민의 대상을 정합니다.

‘우리는 일반시민에게 역도들의 명령에 대한 어떠한 태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 폭압성의 결과는 그 명령에 대하여 절대복종이냐 그렇지 않으면 피신이냐 또는 투옥, 유형, 혹은 총살이냐의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부만 믿고 있다가 서울에서 후퇴도 못하고 그들 치하에 있는 이상 어느 정도라도 그들 정치에 순종치 않을 수도 없고, 그러고 보니 조국에 대한 반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3) 과도기적 결단을 합니다.

‘민족의식에 대한 최소한도의 希望線과 생에 대한 애착의 强度線과의 어떠한 접촉점에 그 기준을 획하여야 할 것이다.’

‘최소한도의 순종행위는 당연히 허용되어야 할 것이요, 그 정도를 초과한 행위만이 위법성을 띠며 여기에 부역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탈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그들에게 협력한 잔류시민이라는 것을 특히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정적인 법인 한 유전적인 사회에서 버림을 당할 것만은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아무리 법이라 한들 진리에 어긋나는 한 단연코 이에 항쟁하여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살려야 한다.’

‘법문에는 명백히 10년 이상의 징역이라고 규정되어 있는 만큼 이에 형의 집행유예라는 제도를 이용할 수도 없는 것이요 결국 무죄 이외에는 이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줄 하등의 수단도 없는 것이다.’

‘재판도 하나의 정치인 것이다. 재판도 국가통치권의 하나의 작용인 이상 국민을 위하여야 할 것이요 동시에 국가를 이롭게 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현실을 똑바로 파악하고 현실에 알맞은 재판을 하여야 할 것이다.’

‘기어코 나는 과도기적 결단을 하였다. 이상 여러 점을 고려하여 처벌하기에는 너무나 무익하다고 동정되는 사건에 대하여서는 오히려 무죄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4) 부언

‘그렇게 처리함은 너무나 관대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국민에 대한 일반경계상 좋지 못한 영향을 줄 것이다‘라는 걱정에 대하여 유병진 판사는 다음과 같이 부언합니다.

‘부역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기보다는 부역을 할 환경을 만들어주지 말라. 일단 후퇴할 때라도 국민을 속이지 말고 피난할 여유를 주라’고.

(5) 판결

만 14세를 초과한 지 불과 4개월에 지나지 않은 홍안 소년이 인민군이 장악한 파출소에서 관계인의 호출전달, 소제, 기타의 심부름을 하였고, 내무서원이 누구의 집은 어디인가 하고 물어 보기에 자신의 집 부근에 있는 2, 3인의 집을 가르쳐주었던 사건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합니다.

유병진 판사는 1951. 1. 30.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 개정되어 비상사태 종료 후 48시간 이내에 원상을 회복한 자는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하자 ’형의 면제라는 정상적인 노정을 걷게 하였다.‘

 

3. 재판관의 고민

대법원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님이 미군정으로부터 사법권을 이양받은 9월 13일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법원의 날을 제정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법원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매우 뜻깊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대한민국 법원’이라는 집을 떠받치고 있는 한 기둥으로서 법철학자 유병진 판사를 세우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되 통일성을 지향해온 대한민국 법원의 전통이 우리 앞에 닥친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리라 기대하며, 특히 법률가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2015. 6. 24. 창원에서 자작나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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