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괄
에티엔 드 라 보에시가 쓴 <자발적 복종>을 읽었다. 저자는 1530년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오를레앙대학교에서 법학사를 취득한 1554년에 보르도의회 고등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저자는 오를레앙대학교 입학할 무렵 초고를 썼다. 라 보에시가 말하는 복종의 가장 큰 이유는 습관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망각이다. 자발적 복종이 작동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자유를 잃은 사람들이 용기도 함께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목수정, 심영길씨가 번역을 하였는데, 역자 서문, 역자 후기도 붙어 있다.
2. 발췌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 인간이지만,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스스로 지켜낼 때에만 우리는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큰 사치를 비로소 누릴 수 있다(목수정)
독재자가 커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의 무릎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어선다면, 그는 더 이상 우리 위에 있지 않을 것(피에르 베르니오)
독재자의 권력이란 그 권력에 종속된 다른 모든 이들이 그에게 건네준 힘일 뿐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독재자를 참고 견디는 한, 그의 권력이 부리는 횡포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스 군대에서 적국 페르시아 군대를 지휘할 지휘관을 공급해야 한다고 해도 그 숫자가 충분하지 않을 만큼 작았던 그리스 군대는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수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을까? 그들의 군대를 지탱한 것은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용기였다.
다시 독재자에게 말머리를 돌려보자. 그와 싸울 필요는 없다. 그를 패배시킬 필요도 없다. 독재자는 스스로 굴복한다. 민중이 독재자에 대한 굴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스스로 무너진다.
그들은 심지어 복종상태가 지속된 시간의 길이를 통해 그들 위에 군림하는 폭군의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은 결코 악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위에 있는 까닭에 그들에게는 친구가 없다. 그들은 이미 우정의 범주 밖에 있다. 우정의 불문율은 열매를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며, 부조화 속에 비틀거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의 불의를 규탄하려면 자기 나라는 정의로운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 가끔 나는 조국이 없다는 허무함에 빠진다(카뮈)
질서를 강조할 때 조심해야 한다. 진실이 동행하지 않는 질서는 큰 무질서를 초래한다...사회적 질서란 통치 세력과 피통치 세력 사이에 균형관계가 성립되어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균형관계의 성립은 보다 고차원의 원칙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 이 원칙이 바로 정의다. 정의 없는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질서가 정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질서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카뮈)
자유, 평등, 정의. 이 세 가지 개념의 건강한 순환작용이 보장되어야만 민주주의는 성립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 간의 우애 속에 대화와 설득이라는 윤활유가 있어야만 작동하는 메카니즘이다(심영길)
3. 소감
두 가지가 놀랍다. 이 책을 쓴 시기가 1554년 이전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 이전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다른 세계에서는 이러한 사고를 하였다는 점이 놀랍다. 둘째는 이러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고등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점이다.
2015. 4. 25.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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