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괄
김훈 소설 <흑산>을 읽었다. 이 소설은 정약전이 천주교를 믿은 죄로 흑산도에 유배되어 흑산도 바다 물고기의 종류와 생김새와 사는 꼴을 적은 <자산어보>를 펴낸 이야기, 정약전의 조카사위로서 청나라 신부 주문모에게서 세례 받은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파병을 요청하려다가 사형당한 아야기가 모티브를 이룬다. 황사영의 또다른 처삼촌인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인 것이 발각되어 형틀에 묶였다가 '주문모에게 세례받은 자 중에서 황사영이 있다. 사영은 나의 조카사위다. 그를 잡으면 토사討邪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진술한 대가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를 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2. 발췌
<대학>에도 <근사록>에도 매의 고통은 나와 있지 않았다...책은 읽은 자로부터 전해들을 수나 있고, 책과 책 사이를 사념으로 메워나갈 수 있지만, 매는 말로 전할 수 없었고, 전해 받을 수가 없으며 매와 매 사이를 글이나 생각으로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는 책이 아니라 밥에 가까웠다.
무릇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하고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주린 배를 채워줄 수가 있습니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서울에서 흑산이 없었듯이 흑산에서는 서울이 없었다.
봄에 죽은 정약종과 가을에 살아남은 정약용은 똑같이 단호했다. 둘은 정약전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서 이 세상 너머를 엿보았다. 그때 세상의 근원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둘은 제 갈 길을 갔다. 정약종은 그 너머로 갔고 정약용은 세상으로 돌아갔다.
억지로 키우려고 공들이지 말고 스스로 되도록 공들여야 한다. 키워서 길러내는 것은 스스로 됨만 못하다.
여기서 살자. 여기서 사는 수밖에 없다. 고등어와 더불어, 오칠구와 더불어, 창대와 잗팔수와 더불어, 여기서 살자. 섬에서 살자.
졍약전이 멈칫거리면서 배교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때도 정약종은 애초에 정약전에게서 인도받은 그 길을 끝가지 걸어서 서소문 사형장으로 갔다.
정약전은 흑산의 검을 흑자가 무서웠으나, 무서움은 섬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흑 자의 무서움은 당대 전체에 대한 무서움과 같았다...나는 흑산을 자산으로 바꾸어 살려 한다...흑은 무섭다.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가라는 걸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玆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3. 소감
조선은 로마처럼 천주교를 왜 수용할 수 없었을까? 정약용이 황사영을 밀고한 대가로 목숨을 구하고 강진으로 유배되어 목민심서를 비롯한 여려 권의 저술을 남긴 것을 탓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2015. 1. 11. 부산에서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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