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정치사회)

징비록을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4. 11. 11. 22:48

1. 개괄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었다. 저자는 임진왜란이 일어 났을 때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다가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였으며, 선조가 난을 피해 개성에 이르렀을 때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파직당했고 서울 수복 뒤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이 책은 유성룡이 지옥의 전쟁을 겪고 난 뒤 반성의 기록을 남긴 것인데, 이순신 장군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어 있다.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발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군을 쫓아 조령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구나!" 원래 신립은 날쌔고 용감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었다.

 

당시 순찰사들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 때문에 병무에 익숙치 못해 숫자는 많았으나 명령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요지를 지키지도 못했으며, 훈련 또한 일관되게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말을 마친 나는 공책을 꺼내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공책을 펴 보이며 말했다. "후에 이것을 토대로 여러분의 공과 죄를 매긴 다음 임금께 아뢸 것이다."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제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한 팔이 끊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되니 평양성을 점령한 유기나가라 할지라도 지원군이 사라지게 되어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을 한 다음 사형을 감형하고 삭탈관직만 시켰다. 이순신의 노모는 아산에 살았는데 그가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자 고통스러워하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군사를 보내 적선을 물리치고 적의 머리를 40여 개까지 벤 이순신은 이를 진린에게 보내 그의 공으로 돌렸다. 진린은 뜻밖의 대우를 받자 너무 기뻐했다. 이때부터 그는 무슨 일이든 이순신과 협의하여 처리했을 뿐만 아나리 나들이를 나갈 때에도 이순신과 가마를 나란히 하면서 절대 앞서 나가지 않았다.

 

3. 소감

광해군은 의주로 피난 간 선조를 대신하여 국내에서 장수와 백성을 독려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다. 왕이 되고 나서 명과 청 사이에 중립을 지킴으로써 전쟁을 피했다. 그러나 이를 명에 대한 배은으로 생각한 신하들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고 인조는 중립외교정책을 폐기하고 명에 기울었고 이는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부르고 조선은 다시 전쟁에 휩싸이고 결국 청에 항복한다... 유성룡과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 때 항복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같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2014. 11. 11. 창원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