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물)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4. 1. 19. 17:56

1. 개괄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읽었다. 블로그 친구의 추천에 따라 읽었다. 저자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고, 1904년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영국과 미국, 브라질 등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1942년 부인과 함께 자살하였다. 이 책은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또는 폭력에 대항한 양심>이라는 제목으로 1936년 독일어로 출간되었으나, 영어판은 1936년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라는 제목으로 서적시장에 나왔다.

이 책의 내용은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종교개혁가로 알려진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적 관용과 사상의 자유를 얻자마자 독재자로 변하고, 이에 맞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가 칼뱅에 의해 희생된 세르베투스를 거론하며 목숨을 결고 칼뱅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홀로 모든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에 대항해 맞서 싸웠던 사람'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그림자 외에는 뒤에 아무도 없었던'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이야기다.

 

2. 발췌

언제나 그렇듯이 광신주의 시대에 인문주의자는 서로 싸움질하는 광신자들 사이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철저히 고독한 존재일 뿐이었다.

 

삶에서는 거의 언제나 각각의 몫이 갈라져 있는 법이라, 인식하는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인식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대중의 우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증오스러운 체제에 쫓기는 것이야말로, 한 지도자에게는 훗날에 거둘 결정적인 큰 승리의 영적인 전제조건이 된다.

 

감각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런 태도는, 영원히 젊음 없는 모습과 함께 칼뱅의 가장 특징적인 본질이다......규율고 엄격함이 칼뱅 교의의 기초가 된다.

 

칼뱅은 일부러 온갖 하찮은 일들에 대해서 금지령을 내렸다. 모든 개인이 끊임없이 죄를 진 것처럼 느끼고, 전능하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을 영구히 지속시키기 위해서였다.

 

얽매이지 않은 시민, 장 자크 루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네바는 칼뱅에게 빼앗긴 자유를 완전히 되찾게 된다.

 

어쨌든 페스트가 만연하는 동안 모든 독재자에게 꼭 필요한 심리적 권력을 뜻하는, 그의 무오류에 대한 믿음이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분명한 깨달음이 나타났다. 저항은 점점 더 격렬해지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칼뱅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널리 퍼지기만 할 뿐 한 곳으로 모이지는 않았다. 바로 이 점이 언제나 독재권력에게 한동안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며, 독재권력의 추종세력이 숫적으로 더 적더라도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시켜주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카스텔리오에게 양심의 자유란 영혼의 최고선이었고, 그는 이 자유를 위해 모든 세속적인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 별것도 아닌 두 가지 점에서 칼뱅에게 복종만 하면 자신에게 곧장 종교국의 자리가 확보되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카스텔리오에게 그리스도는 칼뱅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정사정 없는 법관이 아니었다. 칼뱅의 복음서는 엄격하고 도식적인 법전이었다. 카스텔리오는 그리스도를 가장 인간적인 인간, 누구나 겸손하게 그의 방식을 좇아 살아가야 할 윤리적인 모범이라 여겼다.

 

지상의 판결문은 절대로 어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죽이는 것은 확신이 아니다.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나를 질식시켜려고만 할 뿐이다.

 

진리를 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범죄가 아니다. 아무도 어떤 신념을 갖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신념은 자유다(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나는 사형선고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이런 일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다르게 생각하는 학자들을 처형하는 일은 인정할 수 없다(루터)

 

쉽게 정열적으로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래 망설이는 사람, 내면에서 진심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천천히 결심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모든 정신적인 투쟁에서 가장 훌륭한 투사들이다.

 

이단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면, 나는 우리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이단자라 부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카스텔리오).

 

나는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칼뱅의 잘못된 주장을 반박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례와 삼위일체 같은 문제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배제하려고 한다.

 

누가 칼뱅을 다른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절대권력을 가진 최고 심판관으로 임명했는가?....그는 옳지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명료함을 두려워하고 있다.

 

세르베투스가 무기를 들고 당신을 공격했다면, 시의회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당신의 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직 펜만 들고 싸웠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의 글에 맞서 쇠와 칼을 쳐들었는가?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진리는 퍼져나가는 것이지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학설도, 어떤 진리도 소리 지르고 악을 쓴다고 더 올바르고 더 참된 것이 되지는 않는다.

 

세계정신이 지상에 드리우는 그림자인 역사란 도덕적인 것도 부도덕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편파적인 인간에게는 올바른 것이 문제가 아니고, 언제나 승리만이 문제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면서 어째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가?

 

지상의 모든 재앙은 '양심을 강제'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즉 편협한 광신주의가 벌이는 피의 시도에서 나온다.

 

3. 소감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는 1563년 48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적들의 발톱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500년 전 타국에서 태어나고 죽은 인물의 삶이 내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뭘까?

 

                      2014. 1. 19. 부산에서 자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