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인물)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를 읽고

자작나무의숲 2013. 7. 28. 10:28

1. 개괄

김도환의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를 읽었다. 저자는 홍대용 사상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규장각 선임연구원을 거쳤다. 이 책은 홍대용이 쓴 계방일기를 번역하고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사료적 근거와 주를 달아 설명한 책이다. 계방일기는 홍대용이 계방이라고 불리는 세자익위사의 시직으로서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의 서연에 드나들며 정조와 그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조선 후기를 통틀어 유학 본연의 전인적 학문, 실천적 학문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담헌 홍대용이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를 풍미한 북학의 문을 열고 그것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2. 발췌

홍대용은 비로소 거문고를 치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거문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거문고가 되어 세상을 바꾸어보려 하고 있었다.

 

학문하는 방법은 별것이 아니라 착하지 못한 것을 빨리 고쳐 착하게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천과 같은 견해가 없을 경우에는 '무슨 일이든 결론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명도를 배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개 배우는 자의 병통 중에 지나치게 자신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예기>에서 疑事毋質 直而勿有 즉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짓지 말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말라'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통 사람 대하는 만큼만 기대하면 그로 하여금 따르게 하기 쉽다(장재)

 

군자는 소인을 그의 악이 나타나기 전에는 포용하여 그로 하여금 나쁜 마음을 고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악이 이미 나타났으면 매우 미워하여 물리침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홍대용이 말한 불설지교 不屑之敎란 맹자의 말이었다. 맹자는 좋지 않게 생각되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거절하였으며 이것 역시 가르치는 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그대로 둘 뿐이었다.

 

무릇 군자와 군자는 도를 같이 하여 벗(朋)이 되고 소인과 소인은 이익을 같이하여 벗이 되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구양수의 <붕당론>)

 

책을 읽으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읽는 법인데 나는 오직 책을 볼 뿐 의심을 할 줄 모르니 어려운 것을 물을 수가 없구나(세손)

 

홍대용이 오늘 소대에서 힘주어 말하고자 한 바는 '사람을 평가할 때 공은 공대로 보여주고 죄는 죄대로 평가하는 주자의 태도' 그것이었다.

 

주자는 격물치지를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 육구연은 맹자가 말한 '깊이생각하지 않아도 알고(良知) 배우지 않아도 능히 할 수 있는 것(良能)'이 사람 누구나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하고 고요히 앉아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기 마음 속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홍대용이 평생 배운 것이 격물치지였고 배운 것의 실천이 곧 그의 삶이었다.

 

궁료로서 말을 아뢰는 도리는 마땅히 먼저 자기 자신부터 다스린 이후에 임금께 책난하는 것입니다. 윗분이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말한 사람의 됨됨이를 묻지 않고 다만 그 말의 좋은 점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홍대용의 사유는 늘 풍속으로 표현된 현실과 왕정으로 표현된 이상 사이에 있었다. 그는 이상만을 좇아 현실을 거슬러 막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오히려 혼란만 심화하는 일이라 여겼다.

 

박지원의 홍대용의 묘지명을 썼다. 거기서 '세상에서 홍대용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그만두어 명예와 이익에 뜻을 끊고 한가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세속 밖에서 놀고자 하였던 것만 알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 많은 사물의 이치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나라 살림을 맡거나 먼 곳에 사신으로 갈만한 사람이었고, 나라를 지킬 기이한 책략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학문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니 곧 민생과 일용의 일인 것이다. 학문이 우활하여 일상에 적용할 수 없다면 진실한 학문이 아니다(김원행).

 

3. 소감

정조는 왜 홍대용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가 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학의 지우침을 바로 잡아 본래의 뜻을 밝히려는 것임을 왜 몰랐을까? 민생을 돌보는 것이 어째서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인가? 정조에게는 왕권강화가 가장 중요해서 홍대용의 북학이 불안해 보였고 홍대용에겐 민생이 가장 중요해서 정조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과거를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이 끝내 같은 길을 가지 못하고 이별한 것은 시대의 한계일까 인물의 한계일까? 민생은 도탄해 빠지고 열강은 호시탐담 우리나라를 노려보고 있는데, 3년상이 맞는지 1년상이 맞는지 같은 예송문제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조선 후기의 정치가 안따깝다. 지금은 다른가?

 

                2013. 7. 28. 부산에서 자작나무